광고1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광고가 붙은 블로그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글에서도 보이겠죠.

 

이렇게 티스토리 블로그에 붙일 수 있는 광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구글 애드센스카카오 애드핏을 들 수가 있습니다.

 

광고를 넣게되면, 들어오시는 분들의 클릭수나 노출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합니다.

 

광고를 넣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 글에서는 어떻게 구글 애드센스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구글 애드센스 광고를 넣는 방법과 광고를 꾸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구글 애드센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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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글 애드센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먼저 로그인을 해줍니다.

(gmail 아이디가 없다면 회원가입을 하셔야합니다.)

 

 

시작하기를 누르면 이렇게 도메인을 입력하고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이메일 주소를 치라고 나옵니다.

 

해당 블로그의 주소를 입력해주세요.


2. 그 다음 메인화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입력한 메일로 연락이 올 겁니다.

 

이런 식으로 HTML 코드를 줍니다.

 

이 코드를 티스토리 블로그에 넣어줘야 애드센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티스토리 블로그 주소 뒤에 /manage를 치시면

 

이렇게 블로그 관리 화면이 나오는데, 왼쪽에 보면 스킨 편집 메뉴가 있습니다.

 

클릭하면

 

 

스킨을 편집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오는데, html 편집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바로 위에 head 밑에 복사 붙여넣기 해주시면 됩니다.

 

하고 적용 버튼 눌러주세요.

 

여기까지 하셨으면, 

 

 

애드센스 홈페이지에 가서 연락처와 주소 등 입력하면

 

활성화가 끝납니다.


3. 구글 애드센스 승인 받기

 

이 부분이 제일 미스터리 입니다.

 

지금도 사실 제 블로그가 다른 블로그처럼 컨텐츠가 많고 그러진 않습니다.

 

저는 글 2개일 때부터 밑져야 본전이지라는 생각으로 신청했습니다.

 

 

구글이 실수한건지, 바로 승인이 났습니다...

(제 글은 퍼오거나 하진 않았고, 글의 절대적인 갯수는 적었지만 글의 양이 많았습니다.)

 

승인 조건을 찾아보니

 

1) 컨텐츠 양이 어느 정도 있을 것

 

2) 표절이 적어야 할 것

(이것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내용이 검색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과 많이 겹치지 않아야합니다.)

 

3) 최근 포스팅 게시물이 있어야 할 것.

 

딱 승인이 나는 조건은 없습니다.

 

저처럼 글 두개쓰고 승인이 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50~60개 작성하고도 승인이 안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글 마음인 것 같습니다 : )

 


4. 광고 설정

 

왼쪽에 광고 버튼을 클릭해줍니다.

 

그럼 밑에 본인 사이트 주소와 함께 자동광고를 설정하겠냐는 창이 뜹니다.

 

자동광고란, 알아서 구글이 알맞는 광고를 넣어주는겁니다.

 

그러나 광고 위치까지 알아서 조정해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컨텐츠 내용을 가리거나, 블로그를 이용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자동광고를 꺼놓고 수동으로 광고를 삽입하는 편입니다.

 

이건 사용자 개인 선택입니다.

 

 

 

상단에 사이트 기준 말고 광고 단위 기준을 선택해줍니다.

 

디스플레이 광고를 클릭해줍니다.

 

 

위쪽에 광고단위 이름을 알아서 지정해주시고

 

오른쪽 상단의 광고크기는 반응형으로 지정해주세요.

(반응형으로 하는 이유는, pc 모바일 환경에 맞춰서 알아서 광고 크기가 변환되기 때문입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HTML 코드가 뜹니다.

 

이걸 복사합니다.

 

 

/manage 입력하셔서 블로그 관리 창으로 가신다음

 

왼쪽 사이드에 플러그인 클릭해줍니다.

 

구글 애드센스(반응형)을 찾아줍니다.

 

잘 안보이면 위에 검색 버튼을 이용하세요.

 

 

그럼 이런 화면이 뜰겁니다.

 

아까 복사했던 html 코드를 저기 흰색 창에 복사해주세요.

 

그 위에는 해당 광고를 글의 상단에 띄울 것인지, 하단에 띄울 것인지 선택하는 겁니다.

 

아까 봤던 광고단위에서 2개를 따로 만들어 

 

하나는 상단, 하나는 하단에 입력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변경사항 적용을 누르면 완료됩니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구글 애드센스 광고를 블로그에 넣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나아가 사이드바에 광고를 넣는 방법,

 

글이 길어졌을 시, 글 중간에 삽입형 광고를 넣는 방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댓글 남겨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 )

 

아이히만의 실제 법정에서의 모습

 

 

1960년, 초라한 차림의 평범하게 생긴 한 중년의 남성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이스라엘 법정에 들어왔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총 15개.

 

살인죄, 인도적범죄, 전쟁범죄, 불법 조직 가담죄 등등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5개의 끔찍한 죄목을 저지른 남자.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그 평범한 남자는 제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 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을 맡아한,

 

즉 유대인을 박해하고 말살한 실무 책임자였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이유를 대화를 통해 살펴보자.

 

 

"나는 독일 정부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 근무했던 독일 공무원이었습니다."

 

"상부에 명령에 따라 단지 그들(유대인들)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시킨 명령을 철저하게 시행했을 뿐입니다."

 

"그 일(학살)은 그당시 독일에선 합법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저항했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따른 죄 일것입니다."

 

그의 법정에서의 항변에 대중들은 분노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만행을 저지른 실무책임자가

 

본인은 하나의 죄도 없다는 이야기를 무려 생중계로 듣고 있었다.

 

 

당시 상황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정신적인 중대한 결함이 있을 것으로 봐서

 

정신과 의사 6명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의사1 : 이 사람의 정신은 지금 나의 정신보다 훨씬 더 정상적입니다.
의사2 : 이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고 좋은 아버지고 좋은 남편일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직자1 :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대중들은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병이 있거나

 

중대한 정신적인 결함이 있을 것으로 100%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으며, 당장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이후 33번의 재판을 더 거치게 되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중대한 전쟁범죄의 1급 전범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 우리가 비판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에서 일하기 전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후 북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전기설비회사 외판원으로 약 2년간 재직한다.

 

노동자 & 외판원은 그 당시 전형적인 서민의 직업이었으며

 

독일 인구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종사하던 직종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재직 중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다.

 

지금에서야 나치당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악의 본질격인 악마집단!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 나치당은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수많은 전쟁배상금으로 지쳐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나타난 한줄기 빛이었다.

 

아이히만도 특별한 사상적 동질감이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나치당에 가입을 하면 약간의 돈을 준다는 소문과

 

지인의 추천으로 가입한 케이스었다.

 


 

아돌프 히틀러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언제부터 나치당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알아보아야한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강경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그들을 옥죄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1.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유대인은 제 2급 시민으로 강등시켰다.

 

이는, 유대인이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도 졸업할 수도 심지어 공직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2. 1935년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을 시절,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다.

 

그 때 통과된 법이 바로 일명 '뉘른베르크법'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더이상 유대인은 독일인과 결혼할 수 없고

 

성관계를 할 수 없으며, 공무담임권을 정지했다.

 

이를 어길 시,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

 


히틀러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알아서 배척했으면 하는 바램은 1938년 마침내 이뤄졌다.

 

독일 전역에서 나치대원들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 상점 7500개의 유리창을 다 깨부순 것.

 

이를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흐트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나치당이 그렇게 원했던 

 

유대인과 독일인의 물리적, 정신적 격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유대인 추방과, 수용소 격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즈음 아이히만은 나치의 공무원이었고, 그의 역할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운반하는 수송역할이었다.

 

이 부분에서 아이히만의 천재적 행정 능력이 발휘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몰수하고 격리시키기 위해서

 

유대인 전용 행정기관을 하나 세운다.

 

그 기관은 지금 이야기하면 유대인을 대상으로 ONE-STOP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치 입장에선 그는 정말 일을 잘하는 공무원이었고

 

유대인 입장에선 그는 세상 모를 악마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에서 그는 전세계를 휘든들 수 있는 폭로를 하게된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일이 수용소로 보낼 수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의 도움' 이라는 것이다.

 

나치당에 있었던, 쉽게 이야기하면 완장찬 유대인들(유대인 장로회)이 본인의 안녕과 영위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팔아넘긴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 수용소로 끌려간 어떤 유대인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내내 단 한 명의 독일인도 마주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이 유대인 자신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다는 잔인한 진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히만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천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에 싸여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히려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더이상 유대인에 대한 존중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직 대학살은 시행되기 전이였다. 독일에서 유대인의 추방만이 이루어질 때.)

 


1939년 아이히만은 그 자신이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사건을 겪는다.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즈음 히틀러의 계획이 바뀜으로서 말미암아졌다.

 

원래 그의 계획은 유대인을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에 섞이지 않도록 수용하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당시 프랑스령 식민지)

 

 

바로 이 남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땅에 한데 모아놓으려고 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천재적인 행정시스템을 구축했던 아이히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

 

수백만명을 이주시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예산과 오랜 시간, 그리고 막대한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치 중앙당은 계획을 바꾼다.

 

'절멸'으로.

 


<홀로코스트>

 

다들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독일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범죄이자 전 세계 전무후무한 대학살.

 

그 수정 계획이 담긴 문서가 아이히만에게 도착한다.

 

그 때 처음으로 아이히만 본인이 심하게 동요했다고 회상한다.

 

나치당은 실무자들의 동요를 우려해 각종 전달문서에 절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최종해결책' 이나 '재정착'처럼 그들의 죄책감을 최대한 줄여줄 단어를 사용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전문가로 꽤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는 업무로 잠깐 발령이 나게 된다.

 

아직까지 아이히만은 본인이 수송한 유대인들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한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때 수용소 내부 환경을 처음 보게된 그는 충격을 금치 못한다.

 

지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 동안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트럭에 유대인을 실어, 넓게 파인 구덩이 앞에서 트럭의 문을 열었고,
그리고 시신들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이용해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히만의 법정에서의 회고

 

아이히만은 평소 깊은 상처나 피를 잘 못보는 편이여서

 

절대 커서 의사는 될 수 없을 거라던 소리를 학창시절에 종종 듣는 편이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유대인을 원망해본적이 없으며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 장로회 회장을 개인적 말다툼에 따귀를 때린 것을 후회하며

 

밤잠 설치던 유약한 하나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1년 후, 1942년

 

그의 죄책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당시 베를린 외곽 반제에서 열린 회의가 있었다.

 

그 회의에선 히틀러를 포함한, 당시 독일의 영웅적 인물들 13명이 참석해 

 

함께 식사도 하고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 회의에 아이히만은 서기로 참석한다.

 

그 때 아이히만 마음 속에 살아있던 일말의 죄책감은 모두 자리를 감춘다.

 

아이히만이 말하기를,

 

"그들은 담담하게 유대인 절멸을 논의했고,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그것은 학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통계였고,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하는 공무원이었으며, 나라를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을 느꼈다."

 

*본디오 빌라도란? :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왕이라고 사칭하는 예수를 잡아서 당시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발했는데, 총독이 예수와 면담을 해보니 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끈질긴 처형 요청으로 예수를 처형했다.  


아이히만은 본인의 선택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를 예를 들며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저 일개 공무원이며 국가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히 할 뿐이라고.

 


그 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다.

 

결국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1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아이히만은 

 

15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

 

정보요원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그가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왔다면 나를 잡아 갈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1961년 12월 15일. 아이히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죽기 전 그에게 마지막 부탁이 있냐고 묻자

 

"줄을 좀 헐겁게 묶어주시오. 똑바로 꼿꼿히 내가 설 수 있게."

 

"머리에 두건을 씌워주지마시오. 나는 그런거 필요 없소."

 

그렇게 그는 스스로 뚜벅뚜벅 교수대로 걸어가 목을 매었다.


당신은 아이히만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독일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악으로 분류되었을까.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은 악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당신의 고유 의지로 저지르는 것만이 순수한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규범과 본인에게 들어오는 여러가지의 압박으로 인한 선택도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 니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경우, 니체의 자유의지가 가장 절실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순수하게 나를 돌아봐, 이런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바란다.

영화 박열(2017)

이번 포스팅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은 명백히 존재했던 사실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직접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하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일본 가니가와 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고, 집안 사정으로 조선에서 수학했다.

 

1919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박 열

박 열.

 

조선 경상북도 문경 태생.

 

3.1운동 가담 혐의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19년 일본으로 출국했다.

 


1920년 가네코 후미코는 친구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시 한편을 발견하게 된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이 시에 매료된다.

 


<개새끼>라는 시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열은 3.1운동 이 후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더이상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고조되었고,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자)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나키즘이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운동이다.

국가나 정부 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민족독립을 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다.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개새끼라는 시는 높은 양반(일제)이 자신을 향해 오줌(탄압)을 누어도

 

굴하지 않고 맞서서 자기도 그들에게 오줌발을 갈기겠다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한 풍자시다.

 

억압 받는 나라의 국민이라도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통쾌하게 한방 먹이겠다는 박열의 당당함에

 

후미코는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일본 내에서 박열은 평범한 조선인 유학생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모임을 주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명백한 독립운동가였다.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 유학생들과 자주 교류하는 와중

 

<개새끼>의 저자인 박열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시로 어렴풋이 느꼈던 그의 사상에 더욱 공감하게 됐고,

 

다른 민족이고 심지어 본인의 조국에 칼끝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박열은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태생적으로 타고난 국적의 차이과 본인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요. 제가 함께하고 싶어요."  -후미코

조선독립운동가와 일본인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동지가 되어 함께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에 발각된다.

 

일제는 즉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체포했고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

 

박열은 본인의 단독으로 계획한 거사라고 주장하여

 

그녀에게 죄가 내려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たしも きょうはん."

 

"나는 공범이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실제 그녀가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은채로 가네코는 조선의 한복을 입은 채로 재판에 임한다.

 

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들은 사형선고 전,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이별해야 했다.

 

복역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박열은 22년 4개월 후 광복이 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출소 후에 그는 아내의 기일에는 음식도 먹지 않으며 그녀를 기렸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은 명확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잘못은 분명 몇몇 전범들과 그 당시 일본제국에서 충성을 바쳤던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들의 정책적인 이끔으로 일본 국민들은 따랐던 것이다.

 

잘못된 건 우두머리의 선택이다.

 

위의 사례처럼,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들 조선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아닌 사례도 많았겠지만.

 

최근 한일간의 무역전쟁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불매운동도 일어나고 양국간의 경제적 보복도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조금 이슈가 잠잠해졌을뿐이지 아직도 그 기류는 흐르고 있다고 본다.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상과 일본의 정상간에 어떤 감정의 다툼이 있었고

 

또 어떤 세력은 그 갈등으로 얻는 이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한일 양국의 평범한 국민들끼리는 싸우지 않았으면 좋곘다.

 

일부 극우세력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나라도 양 극단의 사람들은 참 특이한 분들이지 않나.

 

일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참 힘든 상황에서 인접국끼리의 문화적, 경제적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분야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잘못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후미코와 박열이 국경을 초월해 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적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유벤투스 과거 로고

유벤투스(Juventus Football Club S.p.A.)

1897년 11월 1일 창단됐고, 이탈리아 토리노에 적을 둔 클럽이다.

우리나라에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소속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리에 A 우승 36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등

현재 세리에 클럽 가운데 스쿠데토(우승)을 가장 많이 차지한 구단인 유벤투스의 경력에는

세리에 B 우승(2006-07)이 어울리지 않게 박혀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칼초폴리를 들어보셨는가.

칼초폴리란 이탈리아어로 Calciopoli.

단어 자체는 90년대 이탈리아 제1공화국의 부정부패를 드러낸 '탄젠토폴리(Tangentopoli) 스캔들'에서 유래하였다.

'칼초'(calcio)는 이탈리아어로 축구를 뜻한다.

의역하자면, 축구 부정부패 쯤이 되겠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1998년 7월 AS로마의 감독 즈데넥 제만이 유벤투스의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이탈리아 검찰은 유벤투스에 대한 전반적 조사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감청을 시작했다.

그때, 루치아노 폴리(유벤투스 단장)가 이탈리아 축구협회 간부에게

유벤투스 경기에 배정된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듣게되었다.


검찰 뿐 아니라 같은 세리에A 소속 구단들 사이에서도 유벤투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2006년 당시, 인터밀란에 소속되어 있었던 루이스 피구와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가

유벤투스의 수상한 행보에 대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테르의 공론화 기사(출처: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139&amp;aid=0000002349)

텔레콤 이탈리아는 유벤투스의 단장인 모지와 UEFA 심판배정 부위원장과의 통화 등 도청 결과 다수를 검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토리노 검찰청의 수석검사, 마탈레나는 도청내용에 대해

범죄 청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고 FIGC(Federazione Italiana Giuoco Calcio, 이탈리아 축구연맹)으로

자료를 이관한다.

당시 녹취 내용을 들어보면,

"도대체 누가 그딴 심판을 보낸거야?" -모지

" 그는 최고의 심판이오 ㅋ" -베르가모

하는 등 배정에 대해 둘이 공모했다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로 수사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터졌다.

나폴리 검찰청에서 도청자료를 토대로 모지가 소유한 에이전시 회사인 GEA월드의

에이전트 계약시의 불법행위 정황을 포착한 것이였다.

사실 이 것은 유벤투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모지 개인과 그의 아들, 유벤투스의 전 감독인 리피 등 구단 관련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이후 일련의 조사과정에서

5개 구단의 6명의 인사들이 "심판배정관여 및 판정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5개 구단은 모두 (유벤투스, 레지나칼초, 라치오, 피오렌티나, AC밀란)이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협회 차원의 5개 구단의 징계가 이뤄졌는데,

1차 판정

2차 판정

최종 판정

유벤투스 FC

세리에 C 강등, 승점 -30

세리에 B 강등, 승점 -17, 2시즌 우승 박탈

세리에 B 강등, 승점 -9, 2시즌 우승 박탈

레지나 칼초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1

SS 라치오

세리에 B 강등, 승점 -7

잔류, 승점 -11

잔류, 승점 -3

ACF 피오렌티나

세리에 B 강등, 승점 -12

잔류, 승점 -19

잔류, 승점 -15

AC 밀란

세리에 B 강등, 승점 -15

잔류, 승점 -8

잔류, 승점 -8


모두 다음과 같다.

최종 판정에서 유벤투스는 5개 팀 중 가장 무거운 강등과 2시즌 우승 박탈 중징계를 받았다.

2015년 9월 9일 이탈리아 대법원 최종 판결문이 공개되었는데,

판결문을 살펴보며 유벤투스의 범죄 내용을 살펴보자.

I giudici sottolineano l'"irruenta forza di penetrazione anche in ambito federale" dell'ex dirigente bianconero.
대법관들은 전 유벤투스 단장이 "축구협회 등의 공식기관들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Dell'ex dg juventino, la Suprema Corte dice che aveva una "poliedrica capacità di insinuarsi, 'sine titulo', nei gangli vitali dell'organizzazione calcistica ufficiale (Figc e organi in essa inseriti, quali l'Aia)". Senza timore di cadere in "enfatizzazioni", secondo la Cassazione, Moggi aveva una "incontroversa abilità di penetrazione e di condizionamento dei soggetti che si interfacciavano" con lui.
전 유벤투스 단장은 "다각적으로 공인 축구 기관(FIGC 및 그 산하 조직)들의 핵심을 파고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대법원은 말했다. 또한 "과장을 일절 섞지 않고서도" 모지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첨언했다.

Nelle sue "incursioni negli spogliatoi degli arbitri, al termine delle partite, non solo non lesinava giudizi aspramente negativi sull'operato dei direttori di gara, ma esercitava un potere di interlocuzione aggressiva e minacciosa, frutto soltanto di un esercizio smodato del potere - scrive la Cassazione -. Emblematici gli episodi che riguardarono l'arbitro Paparesta e il guardalinee Farneti".
"경기가 종료되면 모지는 심판들의 라커룸에 진입하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정들을 강경하게 비난함은 물론 공격적인 언어로 심판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며, 이는 과도한 권력 행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법원은 명시한다. 파파레스타 주심과 파네티 선심에 대한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L'influenza di Luciano Moggi si estendeva anche su Il processo del luned? - trasmissione condotta all'epoca da Aldo Biscardi -. Ad esempio, affinch? nel corso della trasmissione sportiva specializzata "venisse espresso un giudizio tecnico favorevole", dal commentatore ed ex arbitro Fabio Baldas, sul conto dell'arbitro Tiziano Pieri che aveva diretto Bologna-Juventus, partita contestatissima e vinta uno a zero dai bianconeri il 12 dicembre del 2004. I supremi giudici rilevano che sono emerse "conversazioni significative" tra le quali una tra Moggi e Baldas e l'altra tra Baldas e l'ex designatore Pierluigi Pairetto "in cui il primo chiarisce al secondo la tecnica di applicazione della moviola per evitare di far risaltare i gravi errori commessi dall'arbitro in quella partita, a favore della Juventus".
모지의 입김은 월요일 알도 비스카르디(유명 축구 캐스터)가 진행하는 방송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04년 12월 12일 유벤투스가 0:1로 승리한 볼로냐-유벤투스 경기에서 논란이 되는 판정을 한 심판 티지아노 피에리를 옹호하기 위해, 해설자이자 전직 심판인 파비오 발다스로부터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에서 "유리한 기술적 견해"를 얻어냈다. 대법관들은 이와 관련해 모지와 발다스 사이, 발다스와 전직 심판배정관 피에르루이지 파이레토 사이에 "유의미한 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으며, "이 통화에서 모지는 발다스에게 해당 경기에서 심판이 저지르고 유벤투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오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영상장치를 어떻게 조작할 지를 설명했다.

요약해보면 유벤투스 단장(모지)은

공인 축구 기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권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이를 이용해 세리에A 심판진들에게 유벤투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도록 협박했고,

언론 프로그램까지 장악해 유벤투스에게 이로운 이야기를 하도록 요구했으며

심판배정관과 전직 심판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과 함께,

유벤투스에 유리하게 작용된 오심이 드러나지 않게 영상장치를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계가 충격에 빠졌으며

1980~1990년대 흥행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세리에A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도별 리그 UEFA 포인트(보통 이것으로 리그의 수준을 매긴다)

2006년의 그래프를 보면 줄곧 라리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던 세리에A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2위를 내주는 상황이다.

칼초폴리는 2010년대 후반까지 이탈리아 축구계를 장기 침체로 빠뜨렸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1-2012 시즌 승부조작 혐의로 50여명이 체포되면서

세리에A는 범죄리그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 델피에로.

2000년대 해외축구를 즐겨보셨던 분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델피에로는 2001년부터 안토니오 콘테의 뒤를 이은 유벤투스의 주장이었다.

2006-2007시즌 칼초폴리 사건으로 인해 유벤투스는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델피에로의 실력은 매우 출중했기에 맨유를 포함한 타팀에서 활발한 관심과 이적요청이 쇄도했다.

이때 그는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며 팀에 남는다.

덧붙이자면, 유벤투스의 팬들 별명이 '올드레이디'이다.

그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유벤투스 선수들은 팬들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델피에로 말고도 유벤투스를 위해 팀에 남은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잔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등"

그들에 대한 유벤투스 팬들의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델피에로는 강등된 바로 다음 시즌에 세리에B를 폭격하며 팀을 다시 승격시킨다.

그리곤 세리에A 복귀 시즌에 21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수상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노쇠화로 인해,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유벤투스에 헌신했다.

예전만큼의 환상적인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리더십과 센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2012년 5월 13일.

이미 리그 우승을 확정한 이후, 이탈란타와의 리그 최종전에 델피에로의 축구인생 마지막 경기가 펼쳐진다.

전반 28분 득점까지 성공하며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판타지스타란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후반 교체되는 순간 알리안츠아레나(유벤투스 홈구장)에 모인 모든 관중, 상대팀 선수들까지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

유벤투스를 미치도록 사랑한 판타지스타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타들어갔다.

2012-06-30
이제 끝입니다. 저와 유벤투스와의 계약은 오늘로서 막을 내립니다.
꽤 오래된 뉴스이긴 해도 공식적이란 말은 꽤 강하게 다가오는군요. 제게는 슬픈시간은 아닙니다. 전 어떤 후회도 회한도 없습니다. 요즘 전 제가 비안코네리로 지내왔던 지난 시즌들과 추억들 그리고 저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던 그 순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추억들과 기쁨과 환희,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해서 요 근래의 쓰라린 순간까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었고 토리노에서 가진 나의 마지막 경기후 나눈 포옹 속에서 어느 순간 떠올려진 순간들이 희미하고 거의 사라져가는 것 까지도 보여지더군요. 5월 13일에 찍힌 제 사진에는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픈 모든 것들이 제 마음에 영원히 세겨져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말입니다.

얼마전 휴가를 떠나기 앞서 비노보에 있는 제 락커룸을 정리하고 훈련장을 떠날 때, 여러분이 저와 사진을 찍거나, 제 사인을 받기 위해, 또는 저와 악수를 하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낮이거나 절 기다리시는 걸 몇 개월 동안이나 해 오셨던 팬들 여러분이 기다리고 계시던 그 장소에 멈춰 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가 여러분에게 작별의 인사와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차례가 되었군요.

선수들은 왔다 갈 뿐이지만 유벤투스는 계속 남아있습니다. 나의 팀동료들도 거기에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전 그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전 언제나 그들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 팬들 역시 계속 남아계실 것이고 바로 여러분들이 유벤투스입니다. 여기 남겨진 제 유니폼 역시 전 계속 가감없이 사랑할 것이고 존중할 겁니다. 넘버 10이 들어간 제 이름이 세겨졌던 제 유니폼이 내 후의 어떤 이가 입을 것을 생각하니 행복감이 넘칩니다. 아울러 전 그 유니폼을 입게 될 그 누군가 —그가 이탈리아인이든 다른 해외출신이든— 에게 기쁨을 느낍니다. 그 역시 이 유니폼을 그토록 입기를 희망했었을테니까 말이죠. 아울러 그 누군가가 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제가 저 이전의 레전드들과 챔피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었던것과 같이 그러려고 한다면 제겐 더 없는 영광이 될 거구요.

내일부터 전 더 이상 유벤투스의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언제나 여러분들 중 한명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자 이제 새로운 모험을 할 차례로군요. 19년전의 그때의 여름과 같이 전 지금 굉장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들 고맙습니다.

알레산드로

그가 유벤투스를 떠나며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유벤투스팬들은 그를 보내며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는 유벤투스를 떠나 호주리그로 이적하며 선수생활 막바지를 준비했다.

그리곤 2015년 은퇴했다.


아직까지도 델피에로는 팀의 위기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헌신한 유벤투스의 슈퍼레전드이자 판타지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칼초폴리 사건과 유벤투스 선수들은 별개로 생각해야한다.

칼초폴리는 유벤투스 단장이었던 모리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고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수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모리의 범죄로 가장 피해를 입은건 유벤투스에 헌신했던 선수들과 팬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델피에로 같은 스타는 더이상 팀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칠 때,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남은 그는

돈주고도 못 살 유벤투스 팬들의 영원한 지지를 얻었다.


우리는 종종 순간의 이익을 위해, 영원의 가치를 포기한다.

순간 닥칠 위기의 두려움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멀게 만든다.

델피에로의 로맨틱한 결정을 보며 기도하자.

" 내 고난과 역경에도,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주소서." 라고

두려움은 잠시일 뿐이다.


문학을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시절, 그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누나를 보곤 사랑에 빠진다.

 

그 도서관은 할아버지와 누나, 이렇게 두명이서 운영되었는데

 

소년은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붙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매일매일 도서관을 다니며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몇 년이고 눈으로만 담던 그 여인을 뒤로한 채, 

 

야속하게도 국방부는 그를 부른다.

 

그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군대로 떠났고,

 

도서관에는 매일 오던 소년이 발길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군대에서도 그녀를 잊지 못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휴가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지독한 군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휴가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곳엔 그가 하염없이 그렸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할아버지와 그녀가 있어야 할 그곳엔, 어느 낯선 사람만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을뿐이었다.

 

다급해진 그는 낯선이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지만, 

 

어느 먼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제대한 후에도 한 순간도 그녀를 잊지 못하며 방방곳곳 찾아 헤멨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게 된 후에도 그의 마음 한켠엔 그 여인이 남아있었다.

 

그는 종이에 그녀를 생각하며 문장을 써내려갔다.

 

 

 

즐거운 편지

 

황 동 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위의 이야기는 황동규 시인의 실제 이야기다.

 

그가 결혼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이런 시를 썼다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기도 하다.

 

그가 이런 시를 쓴 배경에는, 물론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해서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기억이 그리워 썼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첫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그 때의 아련한 기억과 분위기, 또 본인의 서툴렀던 모습들이

 

첫사랑의 기억을 수식하며 미화한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난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황동규 시인이 그녀를 찾아서 다시 만난다면, 

 

매일매일 도서관을 다니던 그 소년의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였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살면서 우리는 몇안되는 철학자들의 이름을 듣는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알고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철학계나 우리 삶에 꽤 밀접히 들어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신은 죽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몰라도 신은 죽었다라는 한마디 문장은 다 안다.

 

(심지어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 한 걸까. 더해서 니체는 왜 그렇게 사회를 경멸했을까.

 

오늘은 니체의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도록하자.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2.12~1937.1.5)

루 살로메.

 

그녀는 니체가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한 여자다.

 

니체는 그녀를 처음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별에서 내려와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다.

 

"나의 인생에 새로운 여명이 빛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니체의 사상과 정확히 정반대의 분위기를 내는 달콤한 문장이다.

 

첫눈에 반한 남자의 정형적인 반응인데, 안타깝게도 니체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니체의 친구인 레와 루는 이른바 "정신적인 동거"에 들어간다.

 

루는 니체의 육신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그녀의 몸과 마음, 모두를 원했을 것이다.

 

질투를 이기지 못한 니체는 레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하고, 결별 이후 그녀에게 갖가지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는 그녀에 대한 미련, 사랑, 심지어 저주까지도 담겨있었다.

 

요샛말로 찌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후 니체는 광기에 빠졌고, 그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언 10년이 되고 말았다.

 

그때 바로 그 유명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결별 후 무려 열흘만에 완성했다.

 

'고독을 사랑하고 사회 규칙을 부정하고 본인 자체의 삶을 살아라.' 하는 그의 철학은

 

찢어질듯한 사랑의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니체의 사상에는 기존 사회에 대한 절망과 상처, 그로 인한 고독의 찬양이 담겨 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해 깊숙히 설명하기엔 하루를 다 써도 모자라기 때문에 간략히 써보자면,

 

니체는 자기 의지 없이 사회적 규칙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거의 경멸과 혐오의 대상 수준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 정신을 갖고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창조자가 되어야하는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고독 속에서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소로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위버멘쉬가 되려면 힘에 의지하여 디오니소스적 무한 긍정의 유희를 즐기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낙타 :  ‘전통의 의심 없는 수용과 자명한 계승’, ‘복종 속에서 자신을 즐겁게 만들고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는 허약한 정신의
소유자.
사자 : 기존의 모든 가치에 대해 부정하는 정신.
어린아이 : ‘망각’의 상징. 과거의 모든 것, 모든 권위와 가치, 선과 악의 관념, 도덕과 종교, 신, 형이상학의 원리들에 대한 망각.

 

니체는 우리 모두 낙타에서 사자의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다소 극단적이고 어두운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신을 부정하는 것은 꽤 참신한 일이었으며, 니체의 철학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다실 니체의 철학처럼 살기위해선 주변 사람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 가야 실천할 수 있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범죄에 해당하지 않아야한다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엄청난 철학가이자 천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받아들임에 있어선 분명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신은 참 공평하다.

 

니체는 루 살로메 이후로도 수많은 여자를 사랑했는데 (대표적으로 바그너)

 

단 한번도 살면서 연애에 성공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니체가 신이 없다고 한평생 이야기 한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그에게 신이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애플워치6 애플 공홈

 

드디어 9/23 기준으로 애플워치가 국내 애플스토어에 사전예약이 개시되었다.

 

앞서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격은 같으며,

 

18일에 1차 출시국에서 판매를 시작한 이래로 약 5일 만에 한국에서도 사전예약이 시작됐다.

 


https://www.apple.com/kr/?afid=p238%7Cs2JJX6RCV-dc_mtid_18707vxu38484_pcrid_466989476066_pgrid_16348497201_&cid=aos-kr-kwgo-Brand--slid---product--

 

Apple (대한민국)

Apple이 제시하는 혁신적인 세상을 만나고, iPhone, iPad, Apple Watch, Mac 등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Apple 액세서리, 엔터테인먼트, 전문가 기기 지원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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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공홈

 

공홈에서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를 완료하면 약 2-3주 후에 도착한다고한다.

 

10월 중 순 쯤 언박싱 리뷰가 가능해보인다.

 

앞서 게시물에서 10월 중순부터 사전예약이 가능해보인다고 예상했는데,

 

그것보다 무려 3주나 먼저 한국에도 판매를 시작하는 걸로 보아

 

이번 애플워치 시리즈가 유통과정 상 보다 빠르게 준비가 된 것 같다.


애플워치를 기다린 분들에게 축하드리며,

 

언박싱 리뷰로 다시 찾아오겠다.

 

 

월평동에 위치한 드르쿰다 from 제주

 

드르쿰다 from 제주

 

서구 계룡로314번길 8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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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naver.com

 

드르쿰다 : 넓은 들판을 품다. (제주도 방언)

 

오늘은 월평동에 위치한 드르쿰다 from 제주 카페에 다녀왔다.

 

주차장 완비 : 좁은 골목길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들어가면 주차장이 보인다.

좁은 골목길 안에 있어서 언뜻 보면 주차장이 없어보이지만, 가보면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들어가기 전에 넓은 유료 주차장이 있는데, 꽤 가격대가 사악하니

 

카페 주차장이 다 차지 않았으면 이곳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나무에 조명이 세세하게 달려있는 모습

밤에 방문했는데, 야경이 정말 예뻤다. 

 

나무에 조명을 촘촘히 달아놔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으로 절대 담길 수 없다.

 

이 카페는 이 야경 하나로 충분히 가볼만한 메리트가 있다.

 

카페 내부1
카페 내부2

 

내부에도 수많은 조명이 있었는데, 이 또한 아까 이야기했던 높은 나무들에 달린 조명들과 잘 어우러졌다.

 

야외 테이블도 꽤 많아서 지금처럼 선선한 가을에 참 잘 어울린다.

 

동백나무
감귤

제주 상징인 모형 감귤, 동백꽃을 외부에 배치해놨는데, 제주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새로웠다.

 

조명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위의 사진처럼 각 조명들이 나무들과 꽃에 거의 다 달려있었는데,

 

밤에는 특히 조명이 가진 힘이 더더욱 강해진다.

 

입구

 

피자와 햄버거도 파는 모양이다.

 

요즘 제주 이미지 마케팅이 유행이라, 제주를 테마로 한 주류들도 많이 판매하고 있는데

 

밤에는 카페 뿐 아니라 펍 느낌도 즐길 수 있게끔 잘 만들어놨다.

 

카페 내부 1
카페 내부2

내부도 깔끔하고 널찍했지만, 이 카페는 야외에 매력이 있으니

 

밖으로 나가서 즐기는 걸 추천한다.

 

야외
아메리카노, 돌코롬커피, 티라미수

음료 맛은 평범했다.

 

내 미각이 어떤 원두를 쓰고 로스팅에 어떤 고급기술이 들어가있는지 판별할만큼 

 

예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예쁜 배경,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있으면 , 그깟 맛따위 얼마든지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대는 꽤 비싼 편이다.

 

아메리카노 5,000 , 돌코롬커피 5,500


카페 이름처럼 제주도의 분위기를 완벽히 재현했냐고 묻는다면 

 

조금 애매한 느낌이다.

 

물론 동백꽃과 감귤 모형을 곳곳에 잘 배치하긴 했지만

 

처음 내 시선을 뺴앗아간 것은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조명이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제주 느낌을 느끼고 싶다면 고복저수지의 제주도화를 추천한다.

 


 

재방문 의사 100%

 

 

리더가 사라진 세계

 

(G0 시대를 중심으로)

 

 

 G10, G7 등등 신문이나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용어 일 것이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 G2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문

 

가들은 예측한다. 과연 G2 시대는 올까.

 

현재 국제 사회를 이끌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헤게모니 국가로서 미국이 역할을 수행 하고 있지만 최근 지구촌에 여

 

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서 의문을 가지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는데

 

국력을 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힐러리를 밀어내고 미 대선에서 승리한 커다란 이유가 자국의 이익을 챙겨보자.’

 

하는 미국 시민들의 염원이었다. 따라서 미국도 자국 내의 경기 침체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제 사회의 리더 역할을

 

계속하기에 부담이 따르고 있는 현재다.


 

그렇다면 누가 세계를 이끌 수 있을까. 저자는 당분간 리더 역할을 맡을 국가가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 시대를 G0시대라

 

이야기한다. 리더 역할을 해왔던 국가들이 저마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 질서에 신경 쓰기

 

골치 아픈 탓이리라. 아무도 나설 국가가 없으면 당분간 리더국가가 없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시대를 살면서,

 

모든 국가는 스스로를 위해(Every nation for itself)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

 

고 새로운 자강책을 강구하는 나라와 기업은 승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국가와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G0 시대의 해

 

결책은 변화에 대한 적응에 달려있다.

 

G0 시대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식량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공급책을 찾는 각국의 경

 

쟁으로 그 권력이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넘어갈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2010년 러시아 전역의 가뭄으로 수개월 동안 곡

 

물 수출을 전면 금지 했던 적이 있었다. 러시아는 주요 곡물 수출국이었고, 공급량이 크게 줄자 국제 곡물 가격은 크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식량문제가 대두되었다. 모잠비크에서는 무시무시한 폭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G0 시대를 맞는 러시아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러시아 정부는 구소련 영토에 걸쳐 거대한 세력을 한데 집중하려는 시

 

도가 있을 것이다. 국내 정책적,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서방국가들은 이러한 러시아의 위협

 

적인 시도에 개입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먼저 EU는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EU 주변 회원

 

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데 경제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08년 미국의 부시 정부는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

 

공했을 때 별다른 개입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앞으로 러시아의 행보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매우 힘들것으로 예측된

 

. 그러나 러시아는 유가에 반응이 매우 민감한 국가에 속한다. 유가가 하락한다면 경제 신뢰도를 하락시켜 국가 내부

 

세력들간 파벌싸움이 일어날 여지가 있으며, 유가가 상승한다면 현재의 엘리트 지도 체제가 더욱 공고히 될 것이다. 이렇

 

듯 석유와 가스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산업의 다각화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줄이게 될 것

 

이다.


그렇다면 G0 시대에서 한국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답은 적응과 변화에 달려있다. 한국은 현재 수출에 미국과 중

 

국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뚜렷한 리더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강점을 발휘하려면 차별화된 장점이 존

 

재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의 국력 상승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빠른 시간안에

 

그리고 철저하고 안정적으로 통일을 꾀해야한다. 이는 대북에 관련한 위험을 최대한 줄임으로서, 한국의 국력이 비약적

 

으로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지리적인 이점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러시아, 중국, 나아가 EU까지 육로

 

로 연결이 된다면, 동쪽의 종점인 한국이 물류측면에서 강점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G0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다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리더국가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래본다

 

2015년작 사도

 

<임오화변> :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


*영화를 살펴보기 전에 숙종부터 정조까지의 가계도를 알아보자.

 

숙종 - 인현왕후(정실부인)      --------        자식이 없음.

 

숙종 - 장희빈(후궁)               -------             이 윤 (경종)

 

숙종 - 무수리 최씨               -------             연잉군(영조)

 

숙종 승하 후, 이 윤이 왕좌에 올랐고 이는 경종이다. 

 

경종은 몸이 약해 후사가 없었다.                                            

<연잉군은 이 윤이 있는 이상,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경종은 소론 세력이 붙어있었고,

 

소론의 반대세력인 노론은 연잉군을 밀어줬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 책봉하라고 고했다. *세제 책봉 : 세자로 책봉하라는 것.               

 

안그래도 몸이 아파 친 자식이 없는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하라고까지 하는 노론세력들에게 화가 났고,

 

경종과 소론이 힘을 합쳐 노론의 4대신을 참하기에 이르었다.

 


이 후 경종에게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어느날, 간장게장과 단 감이 수리상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걸 먹고 설사병이 심하게 터진 것.

 

어느 약을 써도 먹히지 않았다.

 

기력을 점점 잃어가는 경종에게 연잉군은 자신의 마음이라며 약을 보내게 되는데, (인삼과 부자)

 

그 약을 먹고 경종은 갑작스레 승하하게 된다.


                         

뚜렷한 후사가 없이 승하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연잉군 밖에 없었고,

 

연잉군은 조선 왕조 제 21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 왕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조이다. 

 

경종의 수상한 죽음때문에 영조는 평생 형을 독살한 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 그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영조에게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 세가지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첫번째 본인이 무수리 출신의 후궁의 자식이었다는 점.

 

두번째 노론세력을 뒤에 업고 왕이 됐다는 점.

 

세번째 경종을 독살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

 

 


따라서 영조는 본인의 천한 출신을 타개하기 위해,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실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종 못지 않은 워커홀릭이었다. 학문에 열중하며, 민생을 살피기 시작한다.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영조도 형제 살인범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힘들었다.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영조 34년, 신치운

신치운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올린 글이다. 영조는 억울해하며 몇번이고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영조가 예민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에서 시작된다.


영조의 후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장세자 - 후궁 정빈이씨, 10살에 사망

 

둘째, 사도세자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한 이후로 영조는 자식이 없어 고민이 많았는데, 그 때 태어난 늦둥이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이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 얼마나 예뻤을까. 영조는 13개월만에 사도세자를 세제책봉한다.

 

빠른 세제 책봉이 사도세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억울한 사건일 것이다.

 

세제 책봉이 단순히 세자로 책봉한다는 의미로만 보면 그리 나쁜 일이 아닐 것이나,

조선의 세자는 차기 왕으로써 받는 여러가지 교육과 예절을 배우는 직책으로,

왕 못지 않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위치이다.

 

그 무거운 자리를 채 성년이 되지 않은 13개월의 핏덩이 아기에게 준 것은 영조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세제책봉과 동시에 저승전(殿) 으로 처소를 옮겼다.

 

아직도 의문인 점이 바로 이 저승전은 영조 처소에서 약 500m 떨어진 먼 곳에 위치했는데,

 

이곳엔 본인이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경종의 전 부인이 살고 있었고

 

심지어 저승전 소주방은 과거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저주하던 불길한 곳이었다.

 

한 술 더 떠, 영조는 세자의 보모들을 경종을 모시던 전 나인들로 배치했다.

 

영유아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어린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보모들이 사도세자에게 글공부는 커녕 무(武)와 병정놀이를 가르킨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이다. 유교적 관념을 가지고 문(文)으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런 나라에서 세자에게 글공부보다 무예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불길한 곳에 굳이 세자를 보낸 이유는 영조 본인의 경종을 죽인 의혹을 덜기위한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닌가 예상된다.

사도세자는 어릴적 매우 영특했던 편이다.

 

두살 때 한자 60자를 깨달았고,

 

세살 때 영조가 세자에게 사치를 묻자, "비단은 사치고, 무명은 사치가 아닙니다." 라고 답할만큼 영리하고 

학습이 빠른 편이였다.

영조는 이걸보고 천재가 나왔구나 하며 세자를 본인의 컴플렉스를 씻어줄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을까.

 

한중록에 이르기를 약 9세와 10세때부터 꾸중을 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크면 클 수록 사도세자는 문을 멀리하고 무예를 가까이하기 시작했고 영조는 이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어린 세자를 달래지 않고, 신하들과 함께 있을 때 세자가 차마 답할 수 없을만큼 어려운 질문을 하며 

세자를 꾸중한다.

 

본인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의도였겠지만, 참으로 야속하다.

 

영조는 꼭 불길한 일이 있을때마다 세자와 함께 나가는데, 

 

이를테면 이렇다. 죄인을 고문하거나 참할 때 세자와 함께 나가는 식이다.

 

본인의 후를 이를 것을 대비해 단단해지라는 의도여서일까. 

 

그러나 사도세자는 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다.

 

그때부터 사도세자는 정신에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도 영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밟아나가기 시작하는데,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무슨 대답을 하면, 항상 귀를 씻었고

귀를 씻은 물을 둘째딸인 화협옹주가 있는 쪽으로 가져다 버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가 되던 해에 왕이 업무를 대신 수행해보는 일종의 인턴십인

 

대리청정을 맡긴다.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사도가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왜 그런 중요한 일은 상의하지 않고 멋대로 결정하느냐" 하며 꾸중하고

 

사도가 영조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그 사소한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느냐" 라며 꾸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 입장에선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갈등에 얽힌 사연은 수도 없이 많은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하나 뽑으라면 이것이다.

 

보통 세자는 궁궐밖을 잘 나가지 못한다.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세상 구경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조는 능에 참배를 하러 갈때도 사도세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영조는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능행에 사도세자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이제 본인을 세자로 인정해주기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도는 너무나 기뻐하며 따라나섰다.

 

그러나, 능행길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가 따라와서 불길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며 사도세자를 궁궐로 돌려보냈다.

 

그때부터 사도는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린다.


정신병이 악화되며 의대증이 생긴다.

 

의대증이 무엇이나면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의복이 몸에 닿게 되면 광분하며 궁녀들을 죽였다.

 

의복을 입으면 아버지를 보러가게 되니까 일종의 트라우마성 공격성발현 이라고 예상된다.

 

이렇게 사도는 줄잡아 약 백여명의 궁궐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따로 부른다.

 

"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 영조

 

" 마음에 울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낫습니다." - 사도

 

" 어찌하여 울화가 나는 것이냐. " - 영조

 

" 마음이 상하여 그리하였습니다. " - 사도

 

"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였느냐." - 영조

 

" 아바마마께서 사랑해주지 아니하시니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사도

 

" 내 이제 그러지 않으리." - 영조

 

처음으로 진심어린 대화가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오갔고, 영조가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를 불러

 

세자를 잘 살피라고 이야기까지 한다.

 

갈등이 이렇게 잘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자는 왕에게 항상 문안인사를 드려야하는데,

 

2~3개월간 영조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동안, 각 종 기행을 하기 시작한다.

 

궁궐에 기생과 여승을 데려다가 축제를 벌이고,

몰래 궐 밖에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넘어서면 안될 선을 넘고 만다.

 

"내 아무리라도 해야겠다."

 

여기서 아무리라는 말은 한중록에 순화해서 쓰여진 말로, 사람을 해한다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그 대상은 바로 본인의 아버지인 영조였다.

 

강력한 군주제였던 조선은 곧 임금이었고, 그 임금을 해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렇게 사도는 스스로 역적이 되었다.


이 말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편을 말리지 않는다.

 

본인의 아들인 이 산을 지키기위한 마음에서일까.

 

사도세자의 실언을 시어머니인 영빈이씨한테 말하는데,

 

영빈이씨는 국왕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세자의 몸이 없는 것이 옳다. 천만번 사랑하여도 나라를 보전하기에는 이 수 밖에 없다."

 

영빈이씨는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라고 이야기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말했을 것이다.


바로 그 날 영조는 세자를 불렀다.

 

낌새가 이상했는지, 사도는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을 앓는다고 말씀드리려 하니, 아들의 휘항(털모자)을 가져오라" - 사도

 

이에 혜경궁 홍씨는 아들의 털모자는 너무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라고 이야기했고

 

사도는 "내가 오늘 나가 죽을 것이니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심술을 알겠네!" 하며 화를 내며 나갔다.

 

바로 이것이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던지며 자결하라 명했다.

 

너무 무서웠던 세자는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 때 사도의 아들인 이산이 들어와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었고,

 

이를 본 혜경궁 홍씨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그렇게 그날 사도는 뒤주속에 들어가게 된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서인 시킨다. 

 

폐서인이 되면 아들 이산과 며느리까지 궁궐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렇게 혜경궁 홍씨와 이산은 궁궐 밖에서 살게 된다.

 

몇년이 지나 영조는 혜경궁 홍씨를 찾아간다.

 

그때 " 모자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도 성은이다" 라며 아들을 궐에 돌려보냈다.

 

이산은 안간다며 울고불고 떼를 쓰는데, 이를 지켜보는 혜경궁 홍씨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였다.

  

사도는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한 광인으로 실록에 기록됐다.

 

사도는 실록 상 죄인이다. 

 

그래서 이산은 사실상 죄인의 자식이기때문에 왕이 될 수가 없다.

 

영조는 그래서 사도세자 호적을 파고, 이산을 먼저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서 세손으로 책봉한다.

 

그때가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기 전이였는데, 

 

명목상 이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기때문에 상복을 벗어야했다.

 

상복을 벗을 때 곡을 하며 우는 소리는 천지에 사무쳤고, 이를 대하는 내 간장은 쇠가 녹을 듯 차마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한중록>

 


이산은 훗날 왕위에 올랐고,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조이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명한 말을 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한 순간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잊지 않고 있었던 정조는 

 

사도세자를 참할 때 찬성했던 대신들을 모조리 찾아 벌한다.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보자.

 

그때 그들은 한나라의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

 

서로 어떤 입장이었을까.

 

누구는 잘못된 교육의 처참한 결과가 광인 사도세자라고 말하고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권력다툼의 이간질에 당한 사도세자라고 말한다.

 

영조는 과연 사도세자를 진심으로 미워했을까.

 

그 답은 추후 영조가 사도세자라는 이름을 칭할 때 나온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세자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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