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2017)

이번 포스팅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은 명백히 존재했던 사실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직접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하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일본 가니가와 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고, 집안 사정으로 조선에서 수학했다.

 

1919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박 열

박 열.

 

조선 경상북도 문경 태생.

 

3.1운동 가담 혐의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19년 일본으로 출국했다.

 


1920년 가네코 후미코는 친구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시 한편을 발견하게 된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이 시에 매료된다.

 


<개새끼>라는 시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열은 3.1운동 이 후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더이상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고조되었고,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자)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나키즘이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운동이다.

국가나 정부 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민족독립을 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다.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개새끼라는 시는 높은 양반(일제)이 자신을 향해 오줌(탄압)을 누어도

 

굴하지 않고 맞서서 자기도 그들에게 오줌발을 갈기겠다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한 풍자시다.

 

억압 받는 나라의 국민이라도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통쾌하게 한방 먹이겠다는 박열의 당당함에

 

후미코는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일본 내에서 박열은 평범한 조선인 유학생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모임을 주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명백한 독립운동가였다.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 유학생들과 자주 교류하는 와중

 

<개새끼>의 저자인 박열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시로 어렴풋이 느꼈던 그의 사상에 더욱 공감하게 됐고,

 

다른 민족이고 심지어 본인의 조국에 칼끝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박열은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태생적으로 타고난 국적의 차이과 본인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요. 제가 함께하고 싶어요."  -후미코

조선독립운동가와 일본인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동지가 되어 함께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에 발각된다.

 

일제는 즉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체포했고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

 

박열은 본인의 단독으로 계획한 거사라고 주장하여

 

그녀에게 죄가 내려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たしも きょうはん."

 

"나는 공범이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실제 그녀가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은채로 가네코는 조선의 한복을 입은 채로 재판에 임한다.

 

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들은 사형선고 전,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이별해야 했다.

 

복역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박열은 22년 4개월 후 광복이 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출소 후에 그는 아내의 기일에는 음식도 먹지 않으며 그녀를 기렸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은 명확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잘못은 분명 몇몇 전범들과 그 당시 일본제국에서 충성을 바쳤던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들의 정책적인 이끔으로 일본 국민들은 따랐던 것이다.

 

잘못된 건 우두머리의 선택이다.

 

위의 사례처럼,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들 조선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아닌 사례도 많았겠지만.

 

최근 한일간의 무역전쟁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불매운동도 일어나고 양국간의 경제적 보복도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조금 이슈가 잠잠해졌을뿐이지 아직도 그 기류는 흐르고 있다고 본다.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상과 일본의 정상간에 어떤 감정의 다툼이 있었고

 

또 어떤 세력은 그 갈등으로 얻는 이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한일 양국의 평범한 국민들끼리는 싸우지 않았으면 좋곘다.

 

일부 극우세력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나라도 양 극단의 사람들은 참 특이한 분들이지 않나.

 

일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참 힘든 상황에서 인접국끼리의 문화적, 경제적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분야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잘못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후미코와 박열이 국경을 초월해 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적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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