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작 사도

 

<임오화변> :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


*영화를 살펴보기 전에 숙종부터 정조까지의 가계도를 알아보자.

 

숙종 - 인현왕후(정실부인)      --------        자식이 없음.

 

숙종 - 장희빈(후궁)               -------             이 윤 (경종)

 

숙종 - 무수리 최씨               -------             연잉군(영조)

 

숙종 승하 후, 이 윤이 왕좌에 올랐고 이는 경종이다. 

 

경종은 몸이 약해 후사가 없었다.                                            

<연잉군은 이 윤이 있는 이상,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경종은 소론 세력이 붙어있었고,

 

소론의 반대세력인 노론은 연잉군을 밀어줬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 책봉하라고 고했다. *세제 책봉 : 세자로 책봉하라는 것.               

 

안그래도 몸이 아파 친 자식이 없는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하라고까지 하는 노론세력들에게 화가 났고,

 

경종과 소론이 힘을 합쳐 노론의 4대신을 참하기에 이르었다.

 


이 후 경종에게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어느날, 간장게장과 단 감이 수리상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걸 먹고 설사병이 심하게 터진 것.

 

어느 약을 써도 먹히지 않았다.

 

기력을 점점 잃어가는 경종에게 연잉군은 자신의 마음이라며 약을 보내게 되는데, (인삼과 부자)

 

그 약을 먹고 경종은 갑작스레 승하하게 된다.


                         

뚜렷한 후사가 없이 승하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연잉군 밖에 없었고,

 

연잉군은 조선 왕조 제 21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 왕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조이다. 

 

경종의 수상한 죽음때문에 영조는 평생 형을 독살한 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 그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영조에게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 세가지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첫번째 본인이 무수리 출신의 후궁의 자식이었다는 점.

 

두번째 노론세력을 뒤에 업고 왕이 됐다는 점.

 

세번째 경종을 독살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

 

 


따라서 영조는 본인의 천한 출신을 타개하기 위해,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실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종 못지 않은 워커홀릭이었다. 학문에 열중하며, 민생을 살피기 시작한다.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영조도 형제 살인범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힘들었다.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영조 34년, 신치운

신치운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올린 글이다. 영조는 억울해하며 몇번이고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영조가 예민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에서 시작된다.


영조의 후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장세자 - 후궁 정빈이씨, 10살에 사망

 

둘째, 사도세자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한 이후로 영조는 자식이 없어 고민이 많았는데, 그 때 태어난 늦둥이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이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 얼마나 예뻤을까. 영조는 13개월만에 사도세자를 세제책봉한다.

 

빠른 세제 책봉이 사도세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억울한 사건일 것이다.

 

세제 책봉이 단순히 세자로 책봉한다는 의미로만 보면 그리 나쁜 일이 아닐 것이나,

조선의 세자는 차기 왕으로써 받는 여러가지 교육과 예절을 배우는 직책으로,

왕 못지 않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위치이다.

 

그 무거운 자리를 채 성년이 되지 않은 13개월의 핏덩이 아기에게 준 것은 영조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세제책봉과 동시에 저승전(殿) 으로 처소를 옮겼다.

 

아직도 의문인 점이 바로 이 저승전은 영조 처소에서 약 500m 떨어진 먼 곳에 위치했는데,

 

이곳엔 본인이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경종의 전 부인이 살고 있었고

 

심지어 저승전 소주방은 과거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저주하던 불길한 곳이었다.

 

한 술 더 떠, 영조는 세자의 보모들을 경종을 모시던 전 나인들로 배치했다.

 

영유아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어린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보모들이 사도세자에게 글공부는 커녕 무(武)와 병정놀이를 가르킨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이다. 유교적 관념을 가지고 문(文)으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런 나라에서 세자에게 글공부보다 무예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불길한 곳에 굳이 세자를 보낸 이유는 영조 본인의 경종을 죽인 의혹을 덜기위한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닌가 예상된다.

사도세자는 어릴적 매우 영특했던 편이다.

 

두살 때 한자 60자를 깨달았고,

 

세살 때 영조가 세자에게 사치를 묻자, "비단은 사치고, 무명은 사치가 아닙니다." 라고 답할만큼 영리하고 

학습이 빠른 편이였다.

영조는 이걸보고 천재가 나왔구나 하며 세자를 본인의 컴플렉스를 씻어줄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을까.

 

한중록에 이르기를 약 9세와 10세때부터 꾸중을 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크면 클 수록 사도세자는 문을 멀리하고 무예를 가까이하기 시작했고 영조는 이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어린 세자를 달래지 않고, 신하들과 함께 있을 때 세자가 차마 답할 수 없을만큼 어려운 질문을 하며 

세자를 꾸중한다.

 

본인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의도였겠지만, 참으로 야속하다.

 

영조는 꼭 불길한 일이 있을때마다 세자와 함께 나가는데, 

 

이를테면 이렇다. 죄인을 고문하거나 참할 때 세자와 함께 나가는 식이다.

 

본인의 후를 이를 것을 대비해 단단해지라는 의도여서일까. 

 

그러나 사도세자는 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다.

 

그때부터 사도세자는 정신에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도 영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밟아나가기 시작하는데,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무슨 대답을 하면, 항상 귀를 씻었고

귀를 씻은 물을 둘째딸인 화협옹주가 있는 쪽으로 가져다 버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가 되던 해에 왕이 업무를 대신 수행해보는 일종의 인턴십인

 

대리청정을 맡긴다.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사도가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면

 

"왜 그런 중요한 일은 상의하지 않고 멋대로 결정하느냐" 하며 꾸중하고

 

사도가 영조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그 사소한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느냐" 라며 꾸중했다고 한다.

 

사도세자 입장에선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갈등에 얽힌 사연은 수도 없이 많은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하나 뽑으라면 이것이다.

 

보통 세자는 궁궐밖을 잘 나가지 못한다.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세상 구경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조는 능에 참배를 하러 갈때도 사도세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영조는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능행에 사도세자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이제 본인을 세자로 인정해주기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도는 너무나 기뻐하며 따라나섰다.

 

그러나, 능행길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가 따라와서 불길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며 사도세자를 궁궐로 돌려보냈다.

 

그때부터 사도는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린다.


정신병이 악화되며 의대증이 생긴다.

 

의대증이 무엇이나면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의복이 몸에 닿게 되면 광분하며 궁녀들을 죽였다.

 

의복을 입으면 아버지를 보러가게 되니까 일종의 트라우마성 공격성발현 이라고 예상된다.

 

이렇게 사도는 줄잡아 약 백여명의 궁궐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따로 부른다.

 

"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 영조

 

" 마음에 울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낫습니다." - 사도

 

" 어찌하여 울화가 나는 것이냐. " - 영조

 

" 마음이 상하여 그리하였습니다. " - 사도

 

"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였느냐." - 영조

 

" 아바마마께서 사랑해주지 아니하시니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사도

 

" 내 이제 그러지 않으리." - 영조

 

처음으로 진심어린 대화가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오갔고, 영조가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를 불러

 

세자를 잘 살피라고 이야기까지 한다.

 

갈등이 이렇게 잘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자는 왕에게 항상 문안인사를 드려야하는데,

 

2~3개월간 영조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동안, 각 종 기행을 하기 시작한다.

 

궁궐에 기생과 여승을 데려다가 축제를 벌이고,

몰래 궐 밖에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도세자는 넘어서면 안될 선을 넘고 만다.

 

"내 아무리라도 해야겠다."

 

여기서 아무리라는 말은 한중록에 순화해서 쓰여진 말로, 사람을 해한다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그 대상은 바로 본인의 아버지인 영조였다.

 

강력한 군주제였던 조선은 곧 임금이었고, 그 임금을 해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렇게 사도는 스스로 역적이 되었다.


이 말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편을 말리지 않는다.

 

본인의 아들인 이 산을 지키기위한 마음에서일까.

 

사도세자의 실언을 시어머니인 영빈이씨한테 말하는데,

 

영빈이씨는 국왕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세자의 몸이 없는 것이 옳다. 천만번 사랑하여도 나라를 보전하기에는 이 수 밖에 없다."

 

영빈이씨는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라고 이야기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말했을 것이다.


바로 그 날 영조는 세자를 불렀다.

 

낌새가 이상했는지, 사도는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을 앓는다고 말씀드리려 하니, 아들의 휘항(털모자)을 가져오라" - 사도

 

이에 혜경궁 홍씨는 아들의 털모자는 너무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라고 이야기했고

 

사도는 "내가 오늘 나가 죽을 것이니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심술을 알겠네!" 하며 화를 내며 나갔다.

 

바로 이것이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던지며 자결하라 명했다.

 

너무 무서웠던 세자는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 때 사도의 아들인 이산이 들어와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었고,

 

이를 본 혜경궁 홍씨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그렇게 그날 사도는 뒤주속에 들어가게 된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서인 시킨다. 

 

폐서인이 되면 아들 이산과 며느리까지 궁궐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렇게 혜경궁 홍씨와 이산은 궁궐 밖에서 살게 된다.

 

몇년이 지나 영조는 혜경궁 홍씨를 찾아간다.

 

그때 " 모자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도 성은이다" 라며 아들을 궐에 돌려보냈다.

 

이산은 안간다며 울고불고 떼를 쓰는데, 이를 지켜보는 혜경궁 홍씨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였다.

  

사도는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한 광인으로 실록에 기록됐다.

 

사도는 실록 상 죄인이다. 

 

그래서 이산은 사실상 죄인의 자식이기때문에 왕이 될 수가 없다.

 

영조는 그래서 사도세자 호적을 파고, 이산을 먼저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서 세손으로 책봉한다.

 

그때가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기 전이였는데, 

 

명목상 이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기때문에 상복을 벗어야했다.

 

상복을 벗을 때 곡을 하며 우는 소리는 천지에 사무쳤고, 이를 대하는 내 간장은 쇠가 녹을 듯 차마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한중록>

 


이산은 훗날 왕위에 올랐고,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조이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명한 말을 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한 순간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잊지 않고 있었던 정조는 

 

사도세자를 참할 때 찬성했던 대신들을 모조리 찾아 벌한다.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보자.

 

그때 그들은 한나라의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

 

서로 어떤 입장이었을까.

 

누구는 잘못된 교육의 처참한 결과가 광인 사도세자라고 말하고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권력다툼의 이간질에 당한 사도세자라고 말한다.

 

영조는 과연 사도세자를 진심으로 미워했을까.

 

그 답은 추후 영조가 사도세자라는 이름을 칭할 때 나온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세자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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