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의 실제 법정에서의 모습

 

 

1960년, 초라한 차림의 평범하게 생긴 한 중년의 남성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이스라엘 법정에 들어왔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총 15개.

 

살인죄, 인도적범죄, 전쟁범죄, 불법 조직 가담죄 등등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5개의 끔찍한 죄목을 저지른 남자.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그 평범한 남자는 제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 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을 맡아한,

 

즉 유대인을 박해하고 말살한 실무 책임자였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이유를 대화를 통해 살펴보자.

 

 

"나는 독일 정부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 근무했던 독일 공무원이었습니다."

 

"상부에 명령에 따라 단지 그들(유대인들)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시킨 명령을 철저하게 시행했을 뿐입니다."

 

"그 일(학살)은 그당시 독일에선 합법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저항했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따른 죄 일것입니다."

 

그의 법정에서의 항변에 대중들은 분노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만행을 저지른 실무책임자가

 

본인은 하나의 죄도 없다는 이야기를 무려 생중계로 듣고 있었다.

 

 

당시 상황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정신적인 중대한 결함이 있을 것으로 봐서

 

정신과 의사 6명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의사1 : 이 사람의 정신은 지금 나의 정신보다 훨씬 더 정상적입니다.
의사2 : 이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고 좋은 아버지고 좋은 남편일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직자1 :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대중들은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병이 있거나

 

중대한 정신적인 결함이 있을 것으로 100%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으며, 당장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이후 33번의 재판을 더 거치게 되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중대한 전쟁범죄의 1급 전범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 우리가 비판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에서 일하기 전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후 북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전기설비회사 외판원으로 약 2년간 재직한다.

 

노동자 & 외판원은 그 당시 전형적인 서민의 직업이었으며

 

독일 인구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종사하던 직종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재직 중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다.

 

지금에서야 나치당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악의 본질격인 악마집단!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 나치당은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수많은 전쟁배상금으로 지쳐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나타난 한줄기 빛이었다.

 

아이히만도 특별한 사상적 동질감이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나치당에 가입을 하면 약간의 돈을 준다는 소문과

 

지인의 추천으로 가입한 케이스었다.

 


 

아돌프 히틀러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언제부터 나치당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알아보아야한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강경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그들을 옥죄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1.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유대인은 제 2급 시민으로 강등시켰다.

 

이는, 유대인이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도 졸업할 수도 심지어 공직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2. 1935년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을 시절,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다.

 

그 때 통과된 법이 바로 일명 '뉘른베르크법'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더이상 유대인은 독일인과 결혼할 수 없고

 

성관계를 할 수 없으며, 공무담임권을 정지했다.

 

이를 어길 시,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

 


히틀러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알아서 배척했으면 하는 바램은 1938년 마침내 이뤄졌다.

 

독일 전역에서 나치대원들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 상점 7500개의 유리창을 다 깨부순 것.

 

이를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흐트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나치당이 그렇게 원했던 

 

유대인과 독일인의 물리적, 정신적 격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유대인 추방과, 수용소 격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즈음 아이히만은 나치의 공무원이었고, 그의 역할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운반하는 수송역할이었다.

 

이 부분에서 아이히만의 천재적 행정 능력이 발휘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몰수하고 격리시키기 위해서

 

유대인 전용 행정기관을 하나 세운다.

 

그 기관은 지금 이야기하면 유대인을 대상으로 ONE-STOP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치 입장에선 그는 정말 일을 잘하는 공무원이었고

 

유대인 입장에선 그는 세상 모를 악마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에서 그는 전세계를 휘든들 수 있는 폭로를 하게된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일이 수용소로 보낼 수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의 도움' 이라는 것이다.

 

나치당에 있었던, 쉽게 이야기하면 완장찬 유대인들(유대인 장로회)이 본인의 안녕과 영위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팔아넘긴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 수용소로 끌려간 어떤 유대인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내내 단 한 명의 독일인도 마주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이 유대인 자신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다는 잔인한 진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히만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천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에 싸여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히려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더이상 유대인에 대한 존중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직 대학살은 시행되기 전이였다. 독일에서 유대인의 추방만이 이루어질 때.)

 


1939년 아이히만은 그 자신이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사건을 겪는다.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즈음 히틀러의 계획이 바뀜으로서 말미암아졌다.

 

원래 그의 계획은 유대인을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에 섞이지 않도록 수용하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당시 프랑스령 식민지)

 

 

바로 이 남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땅에 한데 모아놓으려고 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천재적인 행정시스템을 구축했던 아이히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

 

수백만명을 이주시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예산과 오랜 시간, 그리고 막대한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치 중앙당은 계획을 바꾼다.

 

'절멸'으로.

 


<홀로코스트>

 

다들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독일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범죄이자 전 세계 전무후무한 대학살.

 

그 수정 계획이 담긴 문서가 아이히만에게 도착한다.

 

그 때 처음으로 아이히만 본인이 심하게 동요했다고 회상한다.

 

나치당은 실무자들의 동요를 우려해 각종 전달문서에 절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최종해결책' 이나 '재정착'처럼 그들의 죄책감을 최대한 줄여줄 단어를 사용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전문가로 꽤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는 업무로 잠깐 발령이 나게 된다.

 

아직까지 아이히만은 본인이 수송한 유대인들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한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때 수용소 내부 환경을 처음 보게된 그는 충격을 금치 못한다.

 

지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 동안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트럭에 유대인을 실어, 넓게 파인 구덩이 앞에서 트럭의 문을 열었고,
그리고 시신들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이용해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히만의 법정에서의 회고

 

아이히만은 평소 깊은 상처나 피를 잘 못보는 편이여서

 

절대 커서 의사는 될 수 없을 거라던 소리를 학창시절에 종종 듣는 편이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유대인을 원망해본적이 없으며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 장로회 회장을 개인적 말다툼에 따귀를 때린 것을 후회하며

 

밤잠 설치던 유약한 하나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1년 후, 1942년

 

그의 죄책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당시 베를린 외곽 반제에서 열린 회의가 있었다.

 

그 회의에선 히틀러를 포함한, 당시 독일의 영웅적 인물들 13명이 참석해 

 

함께 식사도 하고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 회의에 아이히만은 서기로 참석한다.

 

그 때 아이히만 마음 속에 살아있던 일말의 죄책감은 모두 자리를 감춘다.

 

아이히만이 말하기를,

 

"그들은 담담하게 유대인 절멸을 논의했고,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그것은 학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통계였고,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하는 공무원이었으며, 나라를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을 느꼈다."

 

*본디오 빌라도란? :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왕이라고 사칭하는 예수를 잡아서 당시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발했는데, 총독이 예수와 면담을 해보니 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끈질긴 처형 요청으로 예수를 처형했다.  


아이히만은 본인의 선택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를 예를 들며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저 일개 공무원이며 국가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히 할 뿐이라고.

 


그 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다.

 

결국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1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아이히만은 

 

15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

 

정보요원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그가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왔다면 나를 잡아 갈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1961년 12월 15일. 아이히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죽기 전 그에게 마지막 부탁이 있냐고 묻자

 

"줄을 좀 헐겁게 묶어주시오. 똑바로 꼿꼿히 내가 설 수 있게."

 

"머리에 두건을 씌워주지마시오. 나는 그런거 필요 없소."

 

그렇게 그는 스스로 뚜벅뚜벅 교수대로 걸어가 목을 매었다.


당신은 아이히만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독일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악으로 분류되었을까.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은 악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당신의 고유 의지로 저지르는 것만이 순수한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규범과 본인에게 들어오는 여러가지의 압박으로 인한 선택도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 니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경우, 니체의 자유의지가 가장 절실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순수하게 나를 돌아봐, 이런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바란다.

영화 박열(2017)

이번 포스팅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은 명백히 존재했던 사실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직접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하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일본 가니가와 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고, 집안 사정으로 조선에서 수학했다.

 

1919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박 열

박 열.

 

조선 경상북도 문경 태생.

 

3.1운동 가담 혐의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19년 일본으로 출국했다.

 


1920년 가네코 후미코는 친구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시 한편을 발견하게 된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이 시에 매료된다.

 


<개새끼>라는 시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열은 3.1운동 이 후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더이상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고조되었고,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자)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나키즘이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운동이다.

국가나 정부 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민족독립을 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다.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개새끼라는 시는 높은 양반(일제)이 자신을 향해 오줌(탄압)을 누어도

 

굴하지 않고 맞서서 자기도 그들에게 오줌발을 갈기겠다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한 풍자시다.

 

억압 받는 나라의 국민이라도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통쾌하게 한방 먹이겠다는 박열의 당당함에

 

후미코는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일본 내에서 박열은 평범한 조선인 유학생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모임을 주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명백한 독립운동가였다.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 유학생들과 자주 교류하는 와중

 

<개새끼>의 저자인 박열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시로 어렴풋이 느꼈던 그의 사상에 더욱 공감하게 됐고,

 

다른 민족이고 심지어 본인의 조국에 칼끝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박열은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태생적으로 타고난 국적의 차이과 본인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요. 제가 함께하고 싶어요."  -후미코

조선독립운동가와 일본인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동지가 되어 함께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에 발각된다.

 

일제는 즉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체포했고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

 

박열은 본인의 단독으로 계획한 거사라고 주장하여

 

그녀에게 죄가 내려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たしも きょうはん."

 

"나는 공범이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실제 그녀가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은채로 가네코는 조선의 한복을 입은 채로 재판에 임한다.

 

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들은 사형선고 전,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이별해야 했다.

 

복역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박열은 22년 4개월 후 광복이 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출소 후에 그는 아내의 기일에는 음식도 먹지 않으며 그녀를 기렸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은 명확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잘못은 분명 몇몇 전범들과 그 당시 일본제국에서 충성을 바쳤던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들의 정책적인 이끔으로 일본 국민들은 따랐던 것이다.

 

잘못된 건 우두머리의 선택이다.

 

위의 사례처럼,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들 조선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아닌 사례도 많았겠지만.

 

최근 한일간의 무역전쟁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불매운동도 일어나고 양국간의 경제적 보복도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조금 이슈가 잠잠해졌을뿐이지 아직도 그 기류는 흐르고 있다고 본다.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상과 일본의 정상간에 어떤 감정의 다툼이 있었고

 

또 어떤 세력은 그 갈등으로 얻는 이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한일 양국의 평범한 국민들끼리는 싸우지 않았으면 좋곘다.

 

일부 극우세력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나라도 양 극단의 사람들은 참 특이한 분들이지 않나.

 

일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참 힘든 상황에서 인접국끼리의 문화적, 경제적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분야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잘못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후미코와 박열이 국경을 초월해 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적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유벤투스 과거 로고

유벤투스(Juventus Football Club S.p.A.)

1897년 11월 1일 창단됐고, 이탈리아 토리노에 적을 둔 클럽이다.

우리나라에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소속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리에 A 우승 36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등

현재 세리에 클럽 가운데 스쿠데토(우승)을 가장 많이 차지한 구단인 유벤투스의 경력에는

세리에 B 우승(2006-07)이 어울리지 않게 박혀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칼초폴리를 들어보셨는가.

칼초폴리란 이탈리아어로 Calciopoli.

단어 자체는 90년대 이탈리아 제1공화국의 부정부패를 드러낸 '탄젠토폴리(Tangentopoli) 스캔들'에서 유래하였다.

'칼초'(calcio)는 이탈리아어로 축구를 뜻한다.

의역하자면, 축구 부정부패 쯤이 되겠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1998년 7월 AS로마의 감독 즈데넥 제만이 유벤투스의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이탈리아 검찰은 유벤투스에 대한 전반적 조사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감청을 시작했다.

그때, 루치아노 폴리(유벤투스 단장)가 이탈리아 축구협회 간부에게

유벤투스 경기에 배정된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듣게되었다.


검찰 뿐 아니라 같은 세리에A 소속 구단들 사이에서도 유벤투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2006년 당시, 인터밀란에 소속되어 있었던 루이스 피구와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가

유벤투스의 수상한 행보에 대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테르의 공론화 기사(출처: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139&amp;aid=0000002349)

텔레콤 이탈리아는 유벤투스의 단장인 모지와 UEFA 심판배정 부위원장과의 통화 등 도청 결과 다수를 검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토리노 검찰청의 수석검사, 마탈레나는 도청내용에 대해

범죄 청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고 FIGC(Federazione Italiana Giuoco Calcio, 이탈리아 축구연맹)으로

자료를 이관한다.

당시 녹취 내용을 들어보면,

"도대체 누가 그딴 심판을 보낸거야?" -모지

" 그는 최고의 심판이오 ㅋ" -베르가모

하는 등 배정에 대해 둘이 공모했다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로 수사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터졌다.

나폴리 검찰청에서 도청자료를 토대로 모지가 소유한 에이전시 회사인 GEA월드의

에이전트 계약시의 불법행위 정황을 포착한 것이였다.

사실 이 것은 유벤투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모지 개인과 그의 아들, 유벤투스의 전 감독인 리피 등 구단 관련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이후 일련의 조사과정에서

5개 구단의 6명의 인사들이 "심판배정관여 및 판정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5개 구단은 모두 (유벤투스, 레지나칼초, 라치오, 피오렌티나, AC밀란)이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협회 차원의 5개 구단의 징계가 이뤄졌는데,

1차 판정

2차 판정

최종 판정

유벤투스 FC

세리에 C 강등, 승점 -30

세리에 B 강등, 승점 -17, 2시즌 우승 박탈

세리에 B 강등, 승점 -9, 2시즌 우승 박탈

레지나 칼초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1

SS 라치오

세리에 B 강등, 승점 -7

잔류, 승점 -11

잔류, 승점 -3

ACF 피오렌티나

세리에 B 강등, 승점 -12

잔류, 승점 -19

잔류, 승점 -15

AC 밀란

세리에 B 강등, 승점 -15

잔류, 승점 -8

잔류, 승점 -8


모두 다음과 같다.

최종 판정에서 유벤투스는 5개 팀 중 가장 무거운 강등과 2시즌 우승 박탈 중징계를 받았다.

2015년 9월 9일 이탈리아 대법원 최종 판결문이 공개되었는데,

판결문을 살펴보며 유벤투스의 범죄 내용을 살펴보자.

I giudici sottolineano l'"irruenta forza di penetrazione anche in ambito federale" dell'ex dirigente bianconero.
대법관들은 전 유벤투스 단장이 "축구협회 등의 공식기관들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Dell'ex dg juventino, la Suprema Corte dice che aveva una "poliedrica capacità di insinuarsi, 'sine titulo', nei gangli vitali dell'organizzazione calcistica ufficiale (Figc e organi in essa inseriti, quali l'Aia)". Senza timore di cadere in "enfatizzazioni", secondo la Cassazione, Moggi aveva una "incontroversa abilità di penetrazione e di condizionamento dei soggetti che si interfacciavano" con lui.
전 유벤투스 단장은 "다각적으로 공인 축구 기관(FIGC 및 그 산하 조직)들의 핵심을 파고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대법원은 말했다. 또한 "과장을 일절 섞지 않고서도" 모지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첨언했다.

Nelle sue "incursioni negli spogliatoi degli arbitri, al termine delle partite, non solo non lesinava giudizi aspramente negativi sull'operato dei direttori di gara, ma esercitava un potere di interlocuzione aggressiva e minacciosa, frutto soltanto di un esercizio smodato del potere - scrive la Cassazione -. Emblematici gli episodi che riguardarono l'arbitro Paparesta e il guardalinee Farneti".
"경기가 종료되면 모지는 심판들의 라커룸에 진입하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정들을 강경하게 비난함은 물론 공격적인 언어로 심판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며, 이는 과도한 권력 행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법원은 명시한다. 파파레스타 주심과 파네티 선심에 대한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L'influenza di Luciano Moggi si estendeva anche su Il processo del luned? - trasmissione condotta all'epoca da Aldo Biscardi -. Ad esempio, affinch? nel corso della trasmissione sportiva specializzata "venisse espresso un giudizio tecnico favorevole", dal commentatore ed ex arbitro Fabio Baldas, sul conto dell'arbitro Tiziano Pieri che aveva diretto Bologna-Juventus, partita contestatissima e vinta uno a zero dai bianconeri il 12 dicembre del 2004. I supremi giudici rilevano che sono emerse "conversazioni significative" tra le quali una tra Moggi e Baldas e l'altra tra Baldas e l'ex designatore Pierluigi Pairetto "in cui il primo chiarisce al secondo la tecnica di applicazione della moviola per evitare di far risaltare i gravi errori commessi dall'arbitro in quella partita, a favore della Juventus".
모지의 입김은 월요일 알도 비스카르디(유명 축구 캐스터)가 진행하는 방송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04년 12월 12일 유벤투스가 0:1로 승리한 볼로냐-유벤투스 경기에서 논란이 되는 판정을 한 심판 티지아노 피에리를 옹호하기 위해, 해설자이자 전직 심판인 파비오 발다스로부터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에서 "유리한 기술적 견해"를 얻어냈다. 대법관들은 이와 관련해 모지와 발다스 사이, 발다스와 전직 심판배정관 피에르루이지 파이레토 사이에 "유의미한 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으며, "이 통화에서 모지는 발다스에게 해당 경기에서 심판이 저지르고 유벤투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오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영상장치를 어떻게 조작할 지를 설명했다.

요약해보면 유벤투스 단장(모지)은

공인 축구 기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권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이를 이용해 세리에A 심판진들에게 유벤투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도록 협박했고,

언론 프로그램까지 장악해 유벤투스에게 이로운 이야기를 하도록 요구했으며

심판배정관과 전직 심판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과 함께,

유벤투스에 유리하게 작용된 오심이 드러나지 않게 영상장치를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계가 충격에 빠졌으며

1980~1990년대 흥행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세리에A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도별 리그 UEFA 포인트(보통 이것으로 리그의 수준을 매긴다)

2006년의 그래프를 보면 줄곧 라리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던 세리에A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2위를 내주는 상황이다.

칼초폴리는 2010년대 후반까지 이탈리아 축구계를 장기 침체로 빠뜨렸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1-2012 시즌 승부조작 혐의로 50여명이 체포되면서

세리에A는 범죄리그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 델피에로.

2000년대 해외축구를 즐겨보셨던 분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델피에로는 2001년부터 안토니오 콘테의 뒤를 이은 유벤투스의 주장이었다.

2006-2007시즌 칼초폴리 사건으로 인해 유벤투스는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델피에로의 실력은 매우 출중했기에 맨유를 포함한 타팀에서 활발한 관심과 이적요청이 쇄도했다.

이때 그는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며 팀에 남는다.

덧붙이자면, 유벤투스의 팬들 별명이 '올드레이디'이다.

그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유벤투스 선수들은 팬들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델피에로 말고도 유벤투스를 위해 팀에 남은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잔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등"

그들에 대한 유벤투스 팬들의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델피에로는 강등된 바로 다음 시즌에 세리에B를 폭격하며 팀을 다시 승격시킨다.

그리곤 세리에A 복귀 시즌에 21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수상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노쇠화로 인해,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유벤투스에 헌신했다.

예전만큼의 환상적인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리더십과 센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2012년 5월 13일.

이미 리그 우승을 확정한 이후, 이탈란타와의 리그 최종전에 델피에로의 축구인생 마지막 경기가 펼쳐진다.

전반 28분 득점까지 성공하며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판타지스타란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후반 교체되는 순간 알리안츠아레나(유벤투스 홈구장)에 모인 모든 관중, 상대팀 선수들까지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

유벤투스를 미치도록 사랑한 판타지스타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타들어갔다.

2012-06-30
이제 끝입니다. 저와 유벤투스와의 계약은 오늘로서 막을 내립니다.
꽤 오래된 뉴스이긴 해도 공식적이란 말은 꽤 강하게 다가오는군요. 제게는 슬픈시간은 아닙니다. 전 어떤 후회도 회한도 없습니다. 요즘 전 제가 비안코네리로 지내왔던 지난 시즌들과 추억들 그리고 저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던 그 순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추억들과 기쁨과 환희,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해서 요 근래의 쓰라린 순간까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었고 토리노에서 가진 나의 마지막 경기후 나눈 포옹 속에서 어느 순간 떠올려진 순간들이 희미하고 거의 사라져가는 것 까지도 보여지더군요. 5월 13일에 찍힌 제 사진에는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픈 모든 것들이 제 마음에 영원히 세겨져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말입니다.

얼마전 휴가를 떠나기 앞서 비노보에 있는 제 락커룸을 정리하고 훈련장을 떠날 때, 여러분이 저와 사진을 찍거나, 제 사인을 받기 위해, 또는 저와 악수를 하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낮이거나 절 기다리시는 걸 몇 개월 동안이나 해 오셨던 팬들 여러분이 기다리고 계시던 그 장소에 멈춰 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가 여러분에게 작별의 인사와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차례가 되었군요.

선수들은 왔다 갈 뿐이지만 유벤투스는 계속 남아있습니다. 나의 팀동료들도 거기에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전 그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전 언제나 그들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 팬들 역시 계속 남아계실 것이고 바로 여러분들이 유벤투스입니다. 여기 남겨진 제 유니폼 역시 전 계속 가감없이 사랑할 것이고 존중할 겁니다. 넘버 10이 들어간 제 이름이 세겨졌던 제 유니폼이 내 후의 어떤 이가 입을 것을 생각하니 행복감이 넘칩니다. 아울러 전 그 유니폼을 입게 될 그 누군가 —그가 이탈리아인이든 다른 해외출신이든— 에게 기쁨을 느낍니다. 그 역시 이 유니폼을 그토록 입기를 희망했었을테니까 말이죠. 아울러 그 누군가가 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제가 저 이전의 레전드들과 챔피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었던것과 같이 그러려고 한다면 제겐 더 없는 영광이 될 거구요.

내일부터 전 더 이상 유벤투스의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언제나 여러분들 중 한명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자 이제 새로운 모험을 할 차례로군요. 19년전의 그때의 여름과 같이 전 지금 굉장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들 고맙습니다.

알레산드로

그가 유벤투스를 떠나며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유벤투스팬들은 그를 보내며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는 유벤투스를 떠나 호주리그로 이적하며 선수생활 막바지를 준비했다.

그리곤 2015년 은퇴했다.


아직까지도 델피에로는 팀의 위기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헌신한 유벤투스의 슈퍼레전드이자 판타지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칼초폴리 사건과 유벤투스 선수들은 별개로 생각해야한다.

칼초폴리는 유벤투스 단장이었던 모리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고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수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모리의 범죄로 가장 피해를 입은건 유벤투스에 헌신했던 선수들과 팬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델피에로 같은 스타는 더이상 팀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칠 때,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남은 그는

돈주고도 못 살 유벤투스 팬들의 영원한 지지를 얻었다.


우리는 종종 순간의 이익을 위해, 영원의 가치를 포기한다.

순간 닥칠 위기의 두려움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멀게 만든다.

델피에로의 로맨틱한 결정을 보며 기도하자.

" 내 고난과 역경에도,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주소서." 라고

두려움은 잠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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