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이제 막 들어선 나는 육체적인 병에 걸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난다 하더라도 치료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2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시작된 배의 통증은 해를 거듭해도 사라지지 않았고 통증의 원인도, 그 실체도, 그리고 그 결과도 알지 못했다. 통증 앞에 모든 일이 무용지물이 되어 살아가기도 버거운 마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빳빳한 종이도 싫었고 울퉁불퉁한 캔버스도 싫었고 불투명한 유화도 싫었다. 마치 세상의 답이 정해져 있다고 강요 받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들었다. 통증의 답을 찾아 다녔지만 매번 실패만 하는 내게 그런 그림은 너무 가식적이었다.
그래서 천을 집었다.
아픈 내 몸에 상처를 낼 수 없고 오직 부드럽게 감싸 안는, 천. 늘어나고 줄어들며 공간을 넘나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천. 위에 올리는 물감마저 내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천. 천은 정답을 찾아 나서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나의 행로와 같았다. 머릿속에 그린 완성된 모습이란 없다. 제멋대로 번져가는 물감은 그림을 망쳐버릴 수도, 효과적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오직 내가 집중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물감을 머금은 붓과 물을 머금은 천이다.
현대에서 ‘정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 잡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삶의 방식이 필수이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삶에는 미래와 과거만 존재할 뿐 현재의 순간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를 상실하고 동시에 잊혀진 몸의 감각은 더욱 빠르게 달려가려는 현대인의 욕심에 결국은 ‘비정상적’인 병을 얻게 된다.
그제야 모든 게 멈춰지고 현재가 나타난다. 지금 여기, 몸의 모든 움직임을 감각해본다. 통증이 있는 곳과 없는 곳, 뛰는 심장과 차가워진 발. 머리를 낮추고 나의 몸을 바라본다. ‘비정상적’인 몸과 몸이 섞여 ‘정상’을 흩트려 놓는 행위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돌아보며 너, 그리고 우리를 받아드려 본다.
몸에 대한 응시는 하루 하루 이어져 나갔다. 끝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응시하고 또 응시한다. 같은 방식의 응시였지만 항상 다른 결과를 낳았다. 통증은 다 하루도 같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묵묵히 아픔과 그 아픔을 잊기 위한 육체에 대한 집중은 이어져 나갔고 그 수많은 날들을 잊지 못하고 쌓아갔다.
통증과 응시는 ‘개선’되거나 다른 모습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명확해질 것 같지만
쌓으면 쌓을수록 형용하기 어려운 형상이 나타날 뿐,
이 전의 경험들이 희미하게 번져 올라간 이미지는 점점 모호해져 간다.
수 많은 통증, 응시, 감내, 절규를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은 바라보는 감상자에게 그 너머의 세상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마치 정답을 바라며 쌓아 올린 날들을 모두 수용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한 혈투를 멈추고, 그저 묵묵히 살아가라는 듯이, 그리고 그저 지금 현실에 집중하라는 듯이.
어머니가 떠 주시던 옷을 입고 자란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가까워진 지금이 되어서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의 손길이 어린 소녀였던 나의 손길보다 서툴다. 여자 ‘짓’을 한다며 장난을 치는 친구의 말에도 불구하고, 힘 조절이 되지 않아서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떠나가는 그가 아름답다.
‘애愛’는 어떻게 드러나는 걸까.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을 인지하고 사랑해야 하고 더하여 타인을 사랑하며 혹은 사랑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하나의 요소로는 표현될 수 없는 사랑은 약간의 몸동작, 표정, 말투, 행동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의 합쳐서 받게 되고 전해진다. 그 찰나의 순간을 담고자 했다. 표현되는 수 만 가지의 사랑의 신호가 벌어지는, 잊혀지기 쉬운 그 소중한 순간을.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는 본래 고통은 죄에 대한 벌임과 동시에 신앙심을 증명하는 표지이기에
신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의 구원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허나 신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한자들을 보다는 악한 자들이 더욱 빠져나오기 쉬우며 악을 방관.방치하는것으로 보아 인간과 선이라는 개념보단 악에게 더욱 애착을 쏟는다고 볼수 있다.
또한 요한묵시록에서도 인간은 다수가 고통받지만 악마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뿐 소거되지 않고 오히려 천년 뒤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끝마쳐진다.
이러한 내용과 시편의 구절을 결합하여 그린 그림으로 인간들은 고난의 상황에서도 신에게 의지하며 믿고 구원을 바라지만 정작 신은 천사들을 보내 인간에게 고난을 더하며, 자신이 더욱 사랑하는 악을 오히려 구원하는 모습으로, 인간이 아무리 선하더라도 신은 악을 더욱 사랑하기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그려내고 싶었다.
사랑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그 중 두 꽃말을 찾아서 인물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했다. 애정을 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갈망하고 갈구하는 사람들의 집착을 그리고자 하였다. 사랑의 괴로움을 당하는 ‘아네모네’와 사랑을 갈구하는 ‘가막살나무’. 아네모네의 주변에는 가막살나무의 열매와 꽃이 둘러싸고있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바로 ‘가족’이 떠 올랐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있을때 비로소 사랑을 느꼈고 작품을 통해서 유동적이지 않고도 가장 크고 깊은 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이 감정을 ‘안락함’이라고 말한다.
‘안락함’이라는 감정은 어린시절 더 크게 와닿았고 어릴때 크게만 느껴졌던 가죽소파가 생각이 났다. 내가 생각했던 ‘가족의 안락함’을 그 소파에 비유를 하였다. 또 잔잔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로 그 사랑의 크기를 나타내었다. 나는 마치 이 모든게 둥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