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소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은 어디서 왔는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성경 데살로니가 후서 310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로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우린 매번 생각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위로를 하며 망상을 덮는다.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가치를 매우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노동에 대한 신성화, 간의 불로소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류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인간은 새롭게 발견한 기술이나 깨우친 이치를 실현하려면 필수적으로 노동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이 발전하여 큰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개발했다고 가정했을 때,

 

설계도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의 노동으로 그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야했다.

 

, 큰 사고의 발전이 실현되려면 인간의 노동이 꼭 필요했다는 부분에서 노동은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왔다.

 

노동을 신성시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증거를 이처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발달과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지금껏 필요한 모든 인간의 노동이 대체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와 미래의 노동의 가치가 과연 같을까? 다시말해 노동의 신성성이 유지 될 수 있을까?


인류 산업혁명의 발전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차 산업혁명 (증기기관)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기계화 혁명이었다.

 

이로 인해 증기열차가 생기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2차 산업혁명(대량생산)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대량생산 혁명이었다.

 

이 것으로 인간은 필요 이상의 공산품을 무수히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잉여 생산물을 사고파는 시장이 활성화 되었고 자본주의 사상이 제대로 출발하게 됐다.

 

3차 산업혁명 (지식 정보 혁명)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지식 정보 혁명이.

 

스마트폰, 컴퓨터, 초고속 인터넷으로 세계화가 가속화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4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지금 우리가 쓰는 물건과 세상을 모두 온라인의 비트화(Bit) 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 물질세계와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루어진 지금의 물질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질이 공간을 점유해야한다.

 

따라서 무언가 이동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이곳에서 무언가 변화를 꾀하려면 인간의 물리적 노동이 필수적으로 더해져야 한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으로 모든 정보들이 온라인 상에 존재한다면 더이상

 

그러한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자면, 데이터를 얻기 위해 인간이 100명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 대신 인공지능에게 이를 맡기면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경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지금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동일하게 옮기려면 그 물건의 정밀한 설계도와

 

이것을 실행 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이터는 원본을 복사해도 품질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훨씬 쉽게 이를 실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희소성의 가치가 더이상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변화하는 것은 물질세계의 규칙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지켜졌던 경제적 질서도 파괴될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점점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면서 인간의 실업문제가 가속화 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더이상 인간은 기존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생산물들은 더 많이 그리고 효율적으로 생산되지만 인간의 수입이 줄어들며 이것을 소비할 수가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소비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공지능과 로봇은 소비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총 수요가 비약적으로 감소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자본주의 체제가 맞이했던

 

가장 큰 위기를 겪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상 이 위기를 해쳐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기본소득이다.

 

미래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생산되는 물품과 소비와의 균형일텐데,

 

생산은 인간보다 더 싸고 효율적인 기계와 인공지능에 맡기고

 

인간은 기본소득으로 이를 소비하며 살아야 자본주의가 이어질 수 있.


필자는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거나 이것으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은 우리 삶에 찾아올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경제적 관념에 대한 변화 일 것이고,

 

그 변화는 높은 확률로 자본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이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시작됐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경제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차 산업 혁명의 중심에 서있는 우리는 이런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해야만 한다.

 

사고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요구될 것이고,

 

먼저 변화에 적응하고 본인의 삶에 적용하는 자가 리더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다시 묻는다.

 

일하지 않은 자는 더이상 먹지도 말아야하는가?

 

니콜로 마키아밸리((1469 ~ 1527)

 

1500년대 이탈리아.

 

잘나가다가 정권이 바뀌며 말단으로 좌초된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키아밸리.

 

그가 이탈리아 군주에게 군주의 본분과 역할에 대해 첨언한 서적이 바로 군주론이다.

 

군주론은 현대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는 고전이지만, 그 내용이 매우 공격적이고 차갑기에

 

아직까지도 군주론에 대한 시선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지금부터 군주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책 처음 마키아밸리가 쓴 헌정사에 보면,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바친다고 쓰여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관료가 왕에게 바치는 충언이자 첨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주는 관대해야하는가, 인색해야하는가?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줘야하는가, 공포감을 줘야하는가?

 

 

군주는 약속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말아야하는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밸리는 군주라면 하여금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는 왜 이렇게 주장했는가.


1 )  군주는 관대해야하는가, 인색해야하는가?

 

그는 군주는 인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웃나라와 외교를 예를 들며 설명했는데, 항상 이웃나라에게 관대하다면

 

점점 그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으레 관대하다가 한 두번 인색하게 되면 금새 노여움을 얻는다라고 했다.

 

그래서 군주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 인색하되,

 

가끔 관대하게 행동한다면 다른나라의 칭송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2 )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줘야하는가, 공포감을 줘야하는가?

 

군주는 국민에게 공포감을 줘야한다고 말했다.

 

이것도 위의 관대와 인색에 대한 관계와 비슷한데, 국민에게 평상시 사랑을 주면

 

칭송을 받고 좋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쉽게 도망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평상시 엄하게 공포감을 줘서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이 무서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예>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하들에게 상냥한 장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법 집행 건수가 그 기간 100차례가 넘을 만큼 엄격하고 무서운 장군이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가끔 장기를 두거나 축제를 하며 즐기기도 했지만

 

군법에 있어선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3 ) 군주는 약속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말아야하는가?

 

이것은 사자와 여우의 예를 들으며 설명했다.

 

 

용맹하고 강인한 모습의 사자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국가의 상황이 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군주 본인이 판단했을 때는 

 

두려워하지말고 말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했다.

 

 

즉시 사자의 탈을 벗고, 여우의 간교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키아밸리는 군주가 절대 해서는 안될 행동도 정의했다.

 

백성들에게 절대 미움 받지 않을 것.

 

여기서 그가 말한 미움이란 재물의 약탈, 곧 세금의 무분별한 수탈을 말했다. 

 

명분이 없는 세금을 과도하게 걷으면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럼 군주 본인이 국가를 이끌어 나갈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첨꾼을 피할 것

아랫 사람이 충고할 때, 호되게 혼내지 말 것.

 

입에 쓴 말을 했다고 말한 사람을 벌주거나 죽이면 결국 주변엔 아첨꾼들만 남아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럼 군주는 본인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건강한 충고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마키아밸리는 군주론 안의 침략론도 수록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통치할 때에,

 

같은 언어, 같은 문화가 있는 지역을 통치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다른 언어, 다른 문화가 있는 지역을 통치하는 데에는 대단한 행운과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라고 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왕이 직접 가서 통치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왕이 그 곳에 가있으면, 침략된 나라의 사람들이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나라가 그 곳을 침략하는 것도 힘들고

 

온갖 물자와 행정이 한데 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발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인 일제와 나치 독일.

 

그들이 침략 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식민지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마키아밸리가 말한 이러한 어려움들을 온전히 겪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진압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으며,

 

독일은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들을 소탕하는데 엄청난 국력을 소비했다.

 

조선은 일본과 가까이 있었지만 절대 문화적으로 동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강압적 통치에

 

반발하는 조선인들을 막지 못했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며, 조선영토를 완전히 합병하지 못하고 

 

조선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의 내용은 지금 껏 역사 안의 다양한 사건에서 증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론에 대한 시선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세를 옹호하고 있다.

  

 

vs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냉혹한 현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의견이 대립한다.

 

흔히 마키아밸리즘이라는 단어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정치인의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정의된다.

 

군주는 나라를 위해 본인의 도덕이나 국민의 대한 인간적 배려는 저버릴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해버리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후자의 의견은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냉혹한 현실을 다룰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를 예로 들면, 세계 여러 나라가 독재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내전이나 혁명을 통해 수많은 피를 흘렸다.

 

도덕과 배려로 이룰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며,

 

이상으로 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현실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러분들은 군주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군주론은 고전이다.

 

고전은 시대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름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주론을 읽고, 마키아밸리에 대한 의견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것은 고전을 읽는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주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니콜로 마키아밸리가 당시 내외로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 군주에게

 

올리는 조언서이자 취업청탁서이다.  

 

군주론이 고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공화정인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혼란스러운 국제 정서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적합한 리더를 고를 수 있는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조언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밸리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군주에게 바치는 조언서로 군주론을 집필했다면,

 

권력이 국민에게 존재하는 지금의 민주주의로 변환해 생각해보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하는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되어야한다.

 

군주정은 한 나라를 왕이 좌지우지 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면 군주를 원망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누군가가 우리를 대표해서 나라를 통치하는 체제다.

 

나라가 망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원망해야하는가.

 

지금까지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이었다.

 

아이히만의 실제 법정에서의 모습

 

 

1960년, 초라한 차림의 평범하게 생긴 한 중년의 남성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이스라엘 법정에 들어왔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총 15개.

 

살인죄, 인도적범죄, 전쟁범죄, 불법 조직 가담죄 등등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5개의 끔찍한 죄목을 저지른 남자.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그 평범한 남자는 제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 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을 맡아한,

 

즉 유대인을 박해하고 말살한 실무 책임자였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이유를 대화를 통해 살펴보자.

 

 

"나는 독일 정부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 근무했던 독일 공무원이었습니다."

 

"상부에 명령에 따라 단지 그들(유대인들)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시킨 명령을 철저하게 시행했을 뿐입니다."

 

"그 일(학살)은 그당시 독일에선 합법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저항했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따른 죄 일것입니다."

 

그의 법정에서의 항변에 대중들은 분노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만행을 저지른 실무책임자가

 

본인은 하나의 죄도 없다는 이야기를 무려 생중계로 듣고 있었다.

 

 

당시 상황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정신적인 중대한 결함이 있을 것으로 봐서

 

정신과 의사 6명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의사1 : 이 사람의 정신은 지금 나의 정신보다 훨씬 더 정상적입니다.
의사2 : 이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고 좋은 아버지고 좋은 남편일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직자1 :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대중들은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병이 있거나

 

중대한 정신적인 결함이 있을 것으로 100%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으며, 당장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이후 33번의 재판을 더 거치게 되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중대한 전쟁범죄의 1급 전범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 우리가 비판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에서 일하기 전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후 북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전기설비회사 외판원으로 약 2년간 재직한다.

 

노동자 & 외판원은 그 당시 전형적인 서민의 직업이었으며

 

독일 인구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종사하던 직종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재직 중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다.

 

지금에서야 나치당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악의 본질격인 악마집단!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 나치당은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수많은 전쟁배상금으로 지쳐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나타난 한줄기 빛이었다.

 

아이히만도 특별한 사상적 동질감이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나치당에 가입을 하면 약간의 돈을 준다는 소문과

 

지인의 추천으로 가입한 케이스었다.

 


 

아돌프 히틀러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언제부터 나치당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알아보아야한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강경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그들을 옥죄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1.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유대인은 제 2급 시민으로 강등시켰다.

 

이는, 유대인이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도 졸업할 수도 심지어 공직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2. 1935년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을 시절,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다.

 

그 때 통과된 법이 바로 일명 '뉘른베르크법'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더이상 유대인은 독일인과 결혼할 수 없고

 

성관계를 할 수 없으며, 공무담임권을 정지했다.

 

이를 어길 시,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

 


히틀러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알아서 배척했으면 하는 바램은 1938년 마침내 이뤄졌다.

 

독일 전역에서 나치대원들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 상점 7500개의 유리창을 다 깨부순 것.

 

이를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흐트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나치당이 그렇게 원했던 

 

유대인과 독일인의 물리적, 정신적 격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유대인 추방과, 수용소 격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즈음 아이히만은 나치의 공무원이었고, 그의 역할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운반하는 수송역할이었다.

 

이 부분에서 아이히만의 천재적 행정 능력이 발휘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몰수하고 격리시키기 위해서

 

유대인 전용 행정기관을 하나 세운다.

 

그 기관은 지금 이야기하면 유대인을 대상으로 ONE-STOP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치 입장에선 그는 정말 일을 잘하는 공무원이었고

 

유대인 입장에선 그는 세상 모를 악마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에서 그는 전세계를 휘든들 수 있는 폭로를 하게된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일이 수용소로 보낼 수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의 도움' 이라는 것이다.

 

나치당에 있었던, 쉽게 이야기하면 완장찬 유대인들(유대인 장로회)이 본인의 안녕과 영위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팔아넘긴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 수용소로 끌려간 어떤 유대인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내내 단 한 명의 독일인도 마주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이 유대인 자신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다는 잔인한 진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히만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천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에 싸여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히려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더이상 유대인에 대한 존중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직 대학살은 시행되기 전이였다. 독일에서 유대인의 추방만이 이루어질 때.)

 


1939년 아이히만은 그 자신이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사건을 겪는다.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즈음 히틀러의 계획이 바뀜으로서 말미암아졌다.

 

원래 그의 계획은 유대인을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에 섞이지 않도록 수용하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당시 프랑스령 식민지)

 

 

바로 이 남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땅에 한데 모아놓으려고 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천재적인 행정시스템을 구축했던 아이히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

 

수백만명을 이주시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예산과 오랜 시간, 그리고 막대한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치 중앙당은 계획을 바꾼다.

 

'절멸'으로.

 


<홀로코스트>

 

다들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독일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범죄이자 전 세계 전무후무한 대학살.

 

그 수정 계획이 담긴 문서가 아이히만에게 도착한다.

 

그 때 처음으로 아이히만 본인이 심하게 동요했다고 회상한다.

 

나치당은 실무자들의 동요를 우려해 각종 전달문서에 절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최종해결책' 이나 '재정착'처럼 그들의 죄책감을 최대한 줄여줄 단어를 사용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전문가로 꽤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는 업무로 잠깐 발령이 나게 된다.

 

아직까지 아이히만은 본인이 수송한 유대인들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한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때 수용소 내부 환경을 처음 보게된 그는 충격을 금치 못한다.

 

지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 동안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트럭에 유대인을 실어, 넓게 파인 구덩이 앞에서 트럭의 문을 열었고,
그리고 시신들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이용해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히만의 법정에서의 회고

 

아이히만은 평소 깊은 상처나 피를 잘 못보는 편이여서

 

절대 커서 의사는 될 수 없을 거라던 소리를 학창시절에 종종 듣는 편이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유대인을 원망해본적이 없으며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 장로회 회장을 개인적 말다툼에 따귀를 때린 것을 후회하며

 

밤잠 설치던 유약한 하나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1년 후, 1942년

 

그의 죄책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당시 베를린 외곽 반제에서 열린 회의가 있었다.

 

그 회의에선 히틀러를 포함한, 당시 독일의 영웅적 인물들 13명이 참석해 

 

함께 식사도 하고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 회의에 아이히만은 서기로 참석한다.

 

그 때 아이히만 마음 속에 살아있던 일말의 죄책감은 모두 자리를 감춘다.

 

아이히만이 말하기를,

 

"그들은 담담하게 유대인 절멸을 논의했고,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그것은 학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통계였고,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하는 공무원이었으며, 나라를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을 느꼈다."

 

*본디오 빌라도란? :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왕이라고 사칭하는 예수를 잡아서 당시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발했는데, 총독이 예수와 면담을 해보니 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끈질긴 처형 요청으로 예수를 처형했다.  


아이히만은 본인의 선택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를 예를 들며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저 일개 공무원이며 국가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히 할 뿐이라고.

 


그 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다.

 

결국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1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아이히만은 

 

15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

 

정보요원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그가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왔다면 나를 잡아 갈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1961년 12월 15일. 아이히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죽기 전 그에게 마지막 부탁이 있냐고 묻자

 

"줄을 좀 헐겁게 묶어주시오. 똑바로 꼿꼿히 내가 설 수 있게."

 

"머리에 두건을 씌워주지마시오. 나는 그런거 필요 없소."

 

그렇게 그는 스스로 뚜벅뚜벅 교수대로 걸어가 목을 매었다.


당신은 아이히만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독일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악으로 분류되었을까.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은 악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당신의 고유 의지로 저지르는 것만이 순수한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규범과 본인에게 들어오는 여러가지의 압박으로 인한 선택도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 니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경우, 니체의 자유의지가 가장 절실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순수하게 나를 돌아봐, 이런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바란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살면서 우리는 몇안되는 철학자들의 이름을 듣는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알고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철학계나 우리 삶에 꽤 밀접히 들어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신은 죽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몰라도 신은 죽었다라는 한마디 문장은 다 안다.

 

(심지어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 한 걸까. 더해서 니체는 왜 그렇게 사회를 경멸했을까.

 

오늘은 니체의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도록하자.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2.12~1937.1.5)

루 살로메.

 

그녀는 니체가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한 여자다.

 

니체는 그녀를 처음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별에서 내려와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다.

 

"나의 인생에 새로운 여명이 빛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니체의 사상과 정확히 정반대의 분위기를 내는 달콤한 문장이다.

 

첫눈에 반한 남자의 정형적인 반응인데, 안타깝게도 니체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니체의 친구인 레와 루는 이른바 "정신적인 동거"에 들어간다.

 

루는 니체의 육신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그녀의 몸과 마음, 모두를 원했을 것이다.

 

질투를 이기지 못한 니체는 레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하고, 결별 이후 그녀에게 갖가지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는 그녀에 대한 미련, 사랑, 심지어 저주까지도 담겨있었다.

 

요샛말로 찌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후 니체는 광기에 빠졌고, 그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언 10년이 되고 말았다.

 

그때 바로 그 유명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결별 후 무려 열흘만에 완성했다.

 

'고독을 사랑하고 사회 규칙을 부정하고 본인 자체의 삶을 살아라.' 하는 그의 철학은

 

찢어질듯한 사랑의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니체의 사상에는 기존 사회에 대한 절망과 상처, 그로 인한 고독의 찬양이 담겨 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해 깊숙히 설명하기엔 하루를 다 써도 모자라기 때문에 간략히 써보자면,

 

니체는 자기 의지 없이 사회적 규칙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거의 경멸과 혐오의 대상 수준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 정신을 갖고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창조자가 되어야하는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고독 속에서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소로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위버멘쉬가 되려면 힘에 의지하여 디오니소스적 무한 긍정의 유희를 즐기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낙타 :  ‘전통의 의심 없는 수용과 자명한 계승’, ‘복종 속에서 자신을 즐겁게 만들고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는 허약한 정신의
소유자.
사자 : 기존의 모든 가치에 대해 부정하는 정신.
어린아이 : ‘망각’의 상징. 과거의 모든 것, 모든 권위와 가치, 선과 악의 관념, 도덕과 종교, 신, 형이상학의 원리들에 대한 망각.

 

니체는 우리 모두 낙타에서 사자의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다소 극단적이고 어두운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신을 부정하는 것은 꽤 참신한 일이었으며, 니체의 철학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다실 니체의 철학처럼 살기위해선 주변 사람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 가야 실천할 수 있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범죄에 해당하지 않아야한다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엄청난 철학가이자 천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받아들임에 있어선 분명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신은 참 공평하다.

 

니체는 루 살로메 이후로도 수많은 여자를 사랑했는데 (대표적으로 바그너)

 

단 한번도 살면서 연애에 성공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니체가 신이 없다고 한평생 이야기 한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그에게 신이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리더가 사라진 세계

 

(G0 시대를 중심으로)

 

 

 G10, G7 등등 신문이나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용어 일 것이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 G2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문

 

가들은 예측한다. 과연 G2 시대는 올까.

 

현재 국제 사회를 이끌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헤게모니 국가로서 미국이 역할을 수행 하고 있지만 최근 지구촌에 여

 

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서 의문을 가지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는데

 

국력을 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힐러리를 밀어내고 미 대선에서 승리한 커다란 이유가 자국의 이익을 챙겨보자.’

 

하는 미국 시민들의 염원이었다. 따라서 미국도 자국 내의 경기 침체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제 사회의 리더 역할을

 

계속하기에 부담이 따르고 있는 현재다.


 

그렇다면 누가 세계를 이끌 수 있을까. 저자는 당분간 리더 역할을 맡을 국가가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 시대를 G0시대라

 

이야기한다. 리더 역할을 해왔던 국가들이 저마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 질서에 신경 쓰기

 

골치 아픈 탓이리라. 아무도 나설 국가가 없으면 당분간 리더국가가 없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시대를 살면서,

 

모든 국가는 스스로를 위해(Every nation for itself)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

 

고 새로운 자강책을 강구하는 나라와 기업은 승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국가와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G0 시대의 해

 

결책은 변화에 대한 적응에 달려있다.

 

G0 시대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식량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공급책을 찾는 각국의 경

 

쟁으로 그 권력이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넘어갈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2010년 러시아 전역의 가뭄으로 수개월 동안 곡

 

물 수출을 전면 금지 했던 적이 있었다. 러시아는 주요 곡물 수출국이었고, 공급량이 크게 줄자 국제 곡물 가격은 크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식량문제가 대두되었다. 모잠비크에서는 무시무시한 폭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G0 시대를 맞는 러시아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러시아 정부는 구소련 영토에 걸쳐 거대한 세력을 한데 집중하려는 시

 

도가 있을 것이다. 국내 정책적,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서방국가들은 이러한 러시아의 위협

 

적인 시도에 개입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먼저 EU는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EU 주변 회원

 

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데 경제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08년 미국의 부시 정부는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

 

공했을 때 별다른 개입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앞으로 러시아의 행보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매우 힘들것으로 예측된

 

. 그러나 러시아는 유가에 반응이 매우 민감한 국가에 속한다. 유가가 하락한다면 경제 신뢰도를 하락시켜 국가 내부

 

세력들간 파벌싸움이 일어날 여지가 있으며, 유가가 상승한다면 현재의 엘리트 지도 체제가 더욱 공고히 될 것이다. 이렇

 

듯 석유와 가스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산업의 다각화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줄이게 될 것

 

이다.


그렇다면 G0 시대에서 한국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답은 적응과 변화에 달려있다. 한국은 현재 수출에 미국과 중

 

국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뚜렷한 리더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강점을 발휘하려면 차별화된 장점이 존

 

재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의 국력 상승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빠른 시간안에

 

그리고 철저하고 안정적으로 통일을 꾀해야한다. 이는 대북에 관련한 위험을 최대한 줄임으로서, 한국의 국력이 비약적

 

으로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지리적인 이점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러시아, 중국, 나아가 EU까지 육로

 

로 연결이 된다면, 동쪽의 종점인 한국이 물류측면에서 강점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G0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다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리더국가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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