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의 큰 흐름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

자연적 자유체계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연적 자유체계란 국가의 간섭이나 사적인 제약이 없고, 수요과 공급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시장을 말한다.

 

, 각 개인이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완전히 자유롭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체제를 말한다.

 

여기서 애덤스미스는 국가는 경쟁의 공정성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기관으로써 존재해야한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 기능의 하나로써,

 

시장 내의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사회 전체의 자원 배분이 자동적으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애덤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기심을 들었다. 

 

그는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와 삶의 질을 향상 시키기 위한 인간의 욕구가

 

곧 생산과 소비를 촉진시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시장의 질서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해

 

그 자체의 기능과 질서가 뚜렷히 유지된다고 보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그러나 1920년대 미국 발 주식시장의 급작스러운 붕괴로 세계에 전례없던 대공황이 찾아왔다.

 

애덤스미스 학파의 자유방임주의론자들의 경제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경제 공황이었다.

 

그때 케인즈는 더이상 자유방임주의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정책적 대안을 내놓는

 

고용, 이자 및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을 발표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완전고용이다.

 

케인즈는 이를 비판하며, 한 나라의 경제가 언제나 완전 고용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완전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부가 시장 기능의 결함을 보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소비가 필수적인데 소비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원활하게 돈을 돌려줘야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국가가 큰 공사나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그로 인한 낙수효과로

 

일자리가 많아 질 것이고 그것은 민간의 돈이 돌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케인즈는 저축보다 소비가 자본주의에 걸맞는 미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1920년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국가 차원에서의 대규모 공사를 하며,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다.


애덤스미스와 케인즈는 주장 중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범위일 것이다.

 

1920년대 대공황으로 애덤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의 한계를 확인한 전세계 경제학자들은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가 최선의 경제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가 찾아오고, 이 역시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후, 다시 자유방임주의로의 회귀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왔다.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 경제가 다시 얼어붙었다.

 

소비가 심각하게 얼어붙자, 국가가 나서서 여러가지 경제 부흥책을 실시해야한다는

 

주장이 솔솔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불로소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은 어디서 왔는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성경 데살로니가 후서 310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로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우린 매번 생각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위로를 하며 망상을 덮는다.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가치를 매우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노동에 대한 신성화, 간의 불로소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류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인간은 새롭게 발견한 기술이나 깨우친 이치를 실현하려면 필수적으로 노동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이 발전하여 큰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개발했다고 가정했을 때,

 

설계도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의 노동으로 그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야했다.

 

, 큰 사고의 발전이 실현되려면 인간의 노동이 꼭 필요했다는 부분에서 노동은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왔다.

 

노동을 신성시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증거를 이처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발달과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지금껏 필요한 모든 인간의 노동이 대체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와 미래의 노동의 가치가 과연 같을까? 다시말해 노동의 신성성이 유지 될 수 있을까?


인류 산업혁명의 발전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차 산업혁명 (증기기관)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기계화 혁명이었다.

 

이로 인해 증기열차가 생기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2차 산업혁명(대량생산)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대량생산 혁명이었다.

 

이 것으로 인간은 필요 이상의 공산품을 무수히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잉여 생산물을 사고파는 시장이 활성화 되었고 자본주의 사상이 제대로 출발하게 됐다.

 

3차 산업혁명 (지식 정보 혁명)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지식 정보 혁명이.

 

스마트폰, 컴퓨터, 초고속 인터넷으로 세계화가 가속화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4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지금 우리가 쓰는 물건과 세상을 모두 온라인의 비트화(Bit) 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 물질세계와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루어진 지금의 물질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질이 공간을 점유해야한다.

 

따라서 무언가 이동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이곳에서 무언가 변화를 꾀하려면 인간의 물리적 노동이 필수적으로 더해져야 한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으로 모든 정보들이 온라인 상에 존재한다면 더이상

 

그러한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자면, 데이터를 얻기 위해 인간이 100명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 대신 인공지능에게 이를 맡기면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경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지금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동일하게 옮기려면 그 물건의 정밀한 설계도와

 

이것을 실행 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이터는 원본을 복사해도 품질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훨씬 쉽게 이를 실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희소성의 가치가 더이상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변화하는 것은 물질세계의 규칙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지켜졌던 경제적 질서도 파괴될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점점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면서 인간의 실업문제가 가속화 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더이상 인간은 기존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생산물들은 더 많이 그리고 효율적으로 생산되지만 인간의 수입이 줄어들며 이것을 소비할 수가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소비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공지능과 로봇은 소비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총 수요가 비약적으로 감소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자본주의 체제가 맞이했던

 

가장 큰 위기를 겪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상 이 위기를 해쳐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기본소득이다.

 

미래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생산되는 물품과 소비와의 균형일텐데,

 

생산은 인간보다 더 싸고 효율적인 기계와 인공지능에 맡기고

 

인간은 기본소득으로 이를 소비하며 살아야 자본주의가 이어질 수 있.


필자는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거나 이것으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은 우리 삶에 찾아올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경제적 관념에 대한 변화 일 것이고,

 

그 변화는 높은 확률로 자본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이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시작됐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경제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차 산업 혁명의 중심에 서있는 우리는 이런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해야만 한다.

 

사고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요구될 것이고,

 

먼저 변화에 적응하고 본인의 삶에 적용하는 자가 리더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다시 묻는다.

 

일하지 않은 자는 더이상 먹지도 말아야하는가?

 

니콜로 마키아밸리((1469 ~ 1527)

 

1500년대 이탈리아.

 

잘나가다가 정권이 바뀌며 말단으로 좌초된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키아밸리.

 

그가 이탈리아 군주에게 군주의 본분과 역할에 대해 첨언한 서적이 바로 군주론이다.

 

군주론은 현대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는 고전이지만, 그 내용이 매우 공격적이고 차갑기에

 

아직까지도 군주론에 대한 시선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지금부터 군주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책 처음 마키아밸리가 쓴 헌정사에 보면,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바친다고 쓰여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관료가 왕에게 바치는 충언이자 첨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주는 관대해야하는가, 인색해야하는가?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줘야하는가, 공포감을 줘야하는가?

 

 

군주는 약속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말아야하는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밸리는 군주라면 하여금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는 왜 이렇게 주장했는가.


1 )  군주는 관대해야하는가, 인색해야하는가?

 

그는 군주는 인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웃나라와 외교를 예를 들며 설명했는데, 항상 이웃나라에게 관대하다면

 

점점 그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으레 관대하다가 한 두번 인색하게 되면 금새 노여움을 얻는다라고 했다.

 

그래서 군주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 인색하되,

 

가끔 관대하게 행동한다면 다른나라의 칭송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2 )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줘야하는가, 공포감을 줘야하는가?

 

군주는 국민에게 공포감을 줘야한다고 말했다.

 

이것도 위의 관대와 인색에 대한 관계와 비슷한데, 국민에게 평상시 사랑을 주면

 

칭송을 받고 좋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쉽게 도망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평상시 엄하게 공포감을 줘서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이 무서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예>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하들에게 상냥한 장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법 집행 건수가 그 기간 100차례가 넘을 만큼 엄격하고 무서운 장군이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가끔 장기를 두거나 축제를 하며 즐기기도 했지만

 

군법에 있어선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3 ) 군주는 약속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말아야하는가?

 

이것은 사자와 여우의 예를 들으며 설명했다.

 

 

용맹하고 강인한 모습의 사자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국가의 상황이 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군주 본인이 판단했을 때는 

 

두려워하지말고 말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했다.

 

 

즉시 사자의 탈을 벗고, 여우의 간교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키아밸리는 군주가 절대 해서는 안될 행동도 정의했다.

 

백성들에게 절대 미움 받지 않을 것.

 

여기서 그가 말한 미움이란 재물의 약탈, 곧 세금의 무분별한 수탈을 말했다. 

 

명분이 없는 세금을 과도하게 걷으면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럼 군주 본인이 국가를 이끌어 나갈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첨꾼을 피할 것

아랫 사람이 충고할 때, 호되게 혼내지 말 것.

 

입에 쓴 말을 했다고 말한 사람을 벌주거나 죽이면 결국 주변엔 아첨꾼들만 남아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럼 군주는 본인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건강한 충고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마키아밸리는 군주론 안의 침략론도 수록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통치할 때에,

 

같은 언어, 같은 문화가 있는 지역을 통치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다른 언어, 다른 문화가 있는 지역을 통치하는 데에는 대단한 행운과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라고 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왕이 직접 가서 통치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왕이 그 곳에 가있으면, 침략된 나라의 사람들이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나라가 그 곳을 침략하는 것도 힘들고

 

온갖 물자와 행정이 한데 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발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인 일제와 나치 독일.

 

그들이 침략 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식민지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마키아밸리가 말한 이러한 어려움들을 온전히 겪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진압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으며,

 

독일은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들을 소탕하는데 엄청난 국력을 소비했다.

 

조선은 일본과 가까이 있었지만 절대 문화적으로 동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강압적 통치에

 

반발하는 조선인들을 막지 못했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며, 조선영토를 완전히 합병하지 못하고 

 

조선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의 내용은 지금 껏 역사 안의 다양한 사건에서 증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론에 대한 시선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세를 옹호하고 있다.

  

 

vs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냉혹한 현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의견이 대립한다.

 

흔히 마키아밸리즘이라는 단어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정치인의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정의된다.

 

군주는 나라를 위해 본인의 도덕이나 국민의 대한 인간적 배려는 저버릴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해버리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후자의 의견은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냉혹한 현실을 다룰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를 예로 들면, 세계 여러 나라가 독재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내전이나 혁명을 통해 수많은 피를 흘렸다.

 

도덕과 배려로 이룰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며,

 

이상으로 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현실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여러분들은 군주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군주론은 고전이다.

 

고전은 시대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름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주론을 읽고, 마키아밸리에 대한 의견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것은 고전을 읽는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주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니콜로 마키아밸리가 당시 내외로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 군주에게

 

올리는 조언서이자 취업청탁서이다.  

 

군주론이 고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공화정인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혼란스러운 국제 정서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적합한 리더를 고를 수 있는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조언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밸리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군주에게 바치는 조언서로 군주론을 집필했다면,

 

권력이 국민에게 존재하는 지금의 민주주의로 변환해 생각해보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하는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되어야한다.

 

군주정은 한 나라를 왕이 좌지우지 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면 군주를 원망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누군가가 우리를 대표해서 나라를 통치하는 체제다.

 

나라가 망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원망해야하는가.

 

지금까지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이었다.

작은 예술가들의 모임 3기

 

작은 예술가들의 모임이 3기로 다시 돌아왔다.

 

1기는 '길가의 핀 꽃들'을 주제로 미생을 표현했고

 

2기는 '우리들의 생각'을 주제로 청춘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건내줬다.

 

3기 주제는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다. 


장소 : 인사동 인영갤러리 3층

 

일시 : 2020년 11월 6일 (금) ~ 11월 9일 (월), 오전 11시~오후 6시

 

*시간이 짧으니, 유의해야한다.

전공 상관 없이 20대 초중반들이 전국에서 모여,

 

그들의 생각을 나누며 탄생한 작은 예술가들의 모임은

 

햇수로 올해 3년 째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빠짐없이 이 전시회를 관람한 팬으로써, 

 

이 전시회를 보며 행(行)과 성장의 위대함을 몸소 느낀다.

 

회차를 거듭 할 수록 발전하는 모습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나 또한 청춘의 한 사람으로써, 이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위한다.

 

코로나로 우울하고 힘든 시기, 전시회로 마음의 위안을 얻어가길 바란다.


 

place.map.kakao.com/321192268

 

인영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3-4 인영아트센터 2,3층 (경운동 66-3)

place.map.kakao.com

 

NEW 애플 이벤트

 

새로운 애플 이벤트 초대장이 공개됐다.

 

저번 애플 이벤트에선 아이패드와 애플워치SE,6를 공개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아이폰12 소식은 없었다.

 

지난 애플 스페셜 이벤트


이벤 스페셜 이벤트에서는 아이폰12 공개가 매우 유력하다.

 

아이폰12 전 모델에 5세대 이동통신 기술 사용

 

고성능 프로페서, OLED 디스플레이 탑재가 점쳐지고 있다.

 

 

맥루머스 아이폰12 출시 예상도

이번 아이폰12는 SE와 SE2의 중간 사이즈인

 

아이폰12 MINI(가칭)가 출시될 것이고

 

보통 아이폰12는 전 시리즈인 11과 동일한 크기

 

12 MAX는 전 시리즈 11 PRO MAX와 동일한 크기 일 것으로 예상됐다.

 

*유출된 라인업

 

아이폰12 미니(5.4인치), 아이폰12(6.1인치), 아이폰12 프로(6.1인치), 아이폰12 프로맥스(6.7인치)


아이폰 12 모델 중 MINI를 제외한 3가지 모델은 전부 5G를 지원한다.

 

때문에 항상 늦게 출시되던 한국 출시일이 빨라질 전망이다.

 

아이폰 11 때 1차 출시국에서 9월 20일에 출시됐지만

 

한국은 10월 25일에야 정식으로 출시됐다.

 

이번 아이폰12 시리즈는 공개 보름 후인 10월 말 발매가 유력하다.

 

한국의 5G망이 다른나라보다 현저하게 많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아이폰 12 유출 이미지

 

 

 

 

가장 중요한 디자인에 대해서 살펴보면

 

아이폰4의 디자인을 부활 시켜 각이 조금 날카로워 진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디자인은 익숙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랜드파워가 더 많이 좌지우지하는 스마트폰 생태계 상

 

결국 판매량은 일정수준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예상되는 스펙으로는

 

A14 프로세서 탑재가 유력하다.

 

기존 프로세서보다 논리밀도를 80%를 높이고 같은 전력 대비 15% 더 빠르며,

 

같은 성능 수준에서 30% 더 낮은 전력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안드로이드 보다 램 용량에 인색했던 애플이기에

 

아이폰12에 탑재되는 램의 용량에 관심이 모아졌다.

 

고급형(PRO)에는 6GB

 

저가형(MINI)에는 4GB 탑재가 유력하다.

 

운영체제 상 안드로이드 보다 램 용량을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량은 아직 안드로이드보다 아쉬운 모양새다.


사전예약은 보통 출시일 2주 전에 시작되는데

 

곧 사전 예약이 시작 될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12를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 드리며

 

사전예약이 시작되면 다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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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다음 메인화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입력한 메일로 연락이 올 겁니다.

 

이런 식으로 HTML 코드를 줍니다.

 

이 코드를 티스토리 블로그에 넣어줘야 애드센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티스토리 블로그 주소 뒤에 /manage를 치시면

 

이렇게 블로그 관리 화면이 나오는데, 왼쪽에 보면 스킨 편집 메뉴가 있습니다.

 

클릭하면

 

 

스킨을 편집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오는데, html 편집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바로 위에 head 밑에 복사 붙여넣기 해주시면 됩니다.

 

하고 적용 버튼 눌러주세요.

 

여기까지 하셨으면, 

 

 

애드센스 홈페이지에 가서 연락처와 주소 등 입력하면

 

활성화가 끝납니다.


3. 구글 애드센스 승인 받기

 

이 부분이 제일 미스터리 입니다.

 

지금도 사실 제 블로그가 다른 블로그처럼 컨텐츠가 많고 그러진 않습니다.

 

저는 글 2개일 때부터 밑져야 본전이지라는 생각으로 신청했습니다.

 

 

구글이 실수한건지, 바로 승인이 났습니다...

(제 글은 퍼오거나 하진 않았고, 글의 절대적인 갯수는 적었지만 글의 양이 많았습니다.)

 

승인 조건을 찾아보니

 

1) 컨텐츠 양이 어느 정도 있을 것

 

2) 표절이 적어야 할 것

(이것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내용이 검색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과 많이 겹치지 않아야합니다.)

 

3) 최근 포스팅 게시물이 있어야 할 것.

 

딱 승인이 나는 조건은 없습니다.

 

저처럼 글 두개쓰고 승인이 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50~60개 작성하고도 승인이 안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글 마음인 것 같습니다 : )

 


4. 광고 설정

 

왼쪽에 광고 버튼을 클릭해줍니다.

 

그럼 밑에 본인 사이트 주소와 함께 자동광고를 설정하겠냐는 창이 뜹니다.

 

자동광고란, 알아서 구글이 알맞는 광고를 넣어주는겁니다.

 

그러나 광고 위치까지 알아서 조정해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컨텐츠 내용을 가리거나, 블로그를 이용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자동광고를 꺼놓고 수동으로 광고를 삽입하는 편입니다.

 

이건 사용자 개인 선택입니다.

 

 

 

상단에 사이트 기준 말고 광고 단위 기준을 선택해줍니다.

 

디스플레이 광고를 클릭해줍니다.

 

 

위쪽에 광고단위 이름을 알아서 지정해주시고

 

오른쪽 상단의 광고크기는 반응형으로 지정해주세요.

(반응형으로 하는 이유는, pc 모바일 환경에 맞춰서 알아서 광고 크기가 변환되기 때문입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HTML 코드가 뜹니다.

 

이걸 복사합니다.

 

 

/manage 입력하셔서 블로그 관리 창으로 가신다음

 

왼쪽 사이드에 플러그인 클릭해줍니다.

 

구글 애드센스(반응형)을 찾아줍니다.

 

잘 안보이면 위에 검색 버튼을 이용하세요.

 

 

그럼 이런 화면이 뜰겁니다.

 

아까 복사했던 html 코드를 저기 흰색 창에 복사해주세요.

 

그 위에는 해당 광고를 글의 상단에 띄울 것인지, 하단에 띄울 것인지 선택하는 겁니다.

 

아까 봤던 광고단위에서 2개를 따로 만들어 

 

하나는 상단, 하나는 하단에 입력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변경사항 적용을 누르면 완료됩니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구글 애드센스 광고를 블로그에 넣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나아가 사이드바에 광고를 넣는 방법,

 

글이 길어졌을 시, 글 중간에 삽입형 광고를 넣는 방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댓글 남겨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 )

 

아이히만의 실제 법정에서의 모습

 

 

1960년, 초라한 차림의 평범하게 생긴 한 중년의 남성이 포승줄에 묶인 채 이스라엘 법정에 들어왔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총 15개.

 

살인죄, 인도적범죄, 전쟁범죄, 불법 조직 가담죄 등등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5개의 끔찍한 죄목을 저지른 남자. 그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그 평범한 남자는 제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 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을 맡아한,

 

즉 유대인을 박해하고 말살한 실무 책임자였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이유를 대화를 통해 살펴보자.

 

 

"나는 독일 정부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시기 근무했던 독일 공무원이었습니다."

 

"상부에 명령에 따라 단지 그들(유대인들)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시킨 명령을 철저하게 시행했을 뿐입니다."

 

"그 일(학살)은 그당시 독일에선 합법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저항했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따른 죄 일것입니다."

 

그의 법정에서의 항변에 대중들은 분노했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만행을 저지른 실무책임자가

 

본인은 하나의 죄도 없다는 이야기를 무려 생중계로 듣고 있었다.

 

 

당시 상황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정신적인 중대한 결함이 있을 것으로 봐서

 

정신과 의사 6명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의사1 : 이 사람의 정신은 지금 나의 정신보다 훨씬 더 정상적입니다.
의사2 : 이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고 좋은 아버지고 좋은 남편일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직자1 :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대중들은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병이 있거나

 

중대한 정신적인 결함이 있을 것으로 100%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으며, 당장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이후 33번의 재판을 더 거치게 되었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중대한 전쟁범죄의 1급 전범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 우리가 비판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에서 일하기 전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 후 북오스트리아 지방에서 전기설비회사 외판원으로 약 2년간 재직한다.

 

노동자 & 외판원은 그 당시 전형적인 서민의 직업이었으며

 

독일 인구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종사하던 직종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재직 중 그는 나치당에 가입한다.

 

지금에서야 나치당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악의 본질격인 악마집단!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 나치당은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수많은 전쟁배상금으로 지쳐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나타난 한줄기 빛이었다.

 

아이히만도 특별한 사상적 동질감이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나치당에 가입을 하면 약간의 돈을 준다는 소문과

 

지인의 추천으로 가입한 케이스었다.

 


 

아돌프 히틀러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언제부터 나치당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알아보아야한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강경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그들을 옥죄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1.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유대인은 제 2급 시민으로 강등시켰다.

 

이는, 유대인이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도 졸업할 수도 심지어 공직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2. 1935년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을 시절,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다.

 

그 때 통과된 법이 바로 일명 '뉘른베르크법'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더이상 유대인은 독일인과 결혼할 수 없고

 

성관계를 할 수 없으며, 공무담임권을 정지했다.

 

이를 어길 시,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

 


히틀러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알아서 배척했으면 하는 바램은 1938년 마침내 이뤄졌다.

 

독일 전역에서 나치대원들이 유럽에 있는 유대인 상점 7500개의 유리창을 다 깨부순 것.

 

이를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흐트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나치당이 그렇게 원했던 

 

유대인과 독일인의 물리적, 정신적 격리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유대인 추방과, 수용소 격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즈음 아이히만은 나치의 공무원이었고, 그의 역할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운반하는 수송역할이었다.

 

이 부분에서 아이히만의 천재적 행정 능력이 발휘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몰수하고 격리시키기 위해서

 

유대인 전용 행정기관을 하나 세운다.

 

그 기관은 지금 이야기하면 유대인을 대상으로 ONE-STOP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치 입장에선 그는 정말 일을 잘하는 공무원이었고

 

유대인 입장에선 그는 세상 모를 악마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에서 그는 전세계를 휘든들 수 있는 폭로를 하게된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일이 수용소로 보낼 수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들의 도움' 이라는 것이다.

 

나치당에 있었던, 쉽게 이야기하면 완장찬 유대인들(유대인 장로회)이 본인의 안녕과 영위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팔아넘긴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 수용소로 끌려간 어떤 유대인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내내 단 한 명의 독일인도 마주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이 유대인 자신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다는 잔인한 진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히만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천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에 싸여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히려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더이상 유대인에 대한 존중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직 대학살은 시행되기 전이였다. 독일에서 유대인의 추방만이 이루어질 때.)

 


1939년 아이히만은 그 자신이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게 된 사건을 겪는다.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즈음 히틀러의 계획이 바뀜으로서 말미암아졌다.

 

원래 그의 계획은 유대인을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딴 곳에 섞이지 않도록 수용하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당시 프랑스령 식민지)

 

 

바로 이 남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땅에 한데 모아놓으려고 했다.

 

그 책임자가 바로 천재적인 행정시스템을 구축했던 아이히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니,

 

수백만명을 이주시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예산과 오랜 시간, 그리고 막대한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치 중앙당은 계획을 바꾼다.

 

'절멸'으로.

 


<홀로코스트>

 

다들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2차 대전 중 독일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범죄이자 전 세계 전무후무한 대학살.

 

그 수정 계획이 담긴 문서가 아이히만에게 도착한다.

 

그 때 처음으로 아이히만 본인이 심하게 동요했다고 회상한다.

 

나치당은 실무자들의 동요를 우려해 각종 전달문서에 절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최종해결책' 이나 '재정착'처럼 그들의 죄책감을 최대한 줄여줄 단어를 사용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송 전문가로 꽤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는 업무로 잠깐 발령이 나게 된다.

 

아직까지 아이히만은 본인이 수송한 유대인들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한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때 수용소 내부 환경을 처음 보게된 그는 충격을 금치 못한다.

 

지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 동안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트럭에 유대인을 실어, 넓게 파인 구덩이 앞에서 트럭의 문을 열었고,
그리고 시신들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이용해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히만의 법정에서의 회고

 

아이히만은 평소 깊은 상처나 피를 잘 못보는 편이여서

 

절대 커서 의사는 될 수 없을 거라던 소리를 학창시절에 종종 듣는 편이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유대인을 원망해본적이 없으며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 장로회 회장을 개인적 말다툼에 따귀를 때린 것을 후회하며

 

밤잠 설치던 유약한 하나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1년 후, 1942년

 

그의 죄책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당시 베를린 외곽 반제에서 열린 회의가 있었다.

 

그 회의에선 히틀러를 포함한, 당시 독일의 영웅적 인물들 13명이 참석해 

 

함께 식사도 하고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였다.

 

그 회의에 아이히만은 서기로 참석한다.

 

그 때 아이히만 마음 속에 살아있던 일말의 죄책감은 모두 자리를 감춘다.

 

아이히만이 말하기를,

 

"그들은 담담하게 유대인 절멸을 논의했고,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그것은 학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통계였고,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하는 공무원이었으며, 나라를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을 느꼈다."

 

*본디오 빌라도란? :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의 왕이라고 사칭하는 예수를 잡아서 당시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발했는데, 총독이 예수와 면담을 해보니 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끈질긴 처형 요청으로 예수를 처형했다.  


아이히만은 본인의 선택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를 예를 들며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그저 일개 공무원이며 국가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히 할 뿐이라고.

 


그 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다.

 

결국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1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아이히만은 

 

15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도피 생활을 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

 

정보요원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그가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왔다면 나를 잡아 갈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1961년 12월 15일. 아이히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죽기 전 그에게 마지막 부탁이 있냐고 묻자

 

"줄을 좀 헐겁게 묶어주시오. 똑바로 꼿꼿히 내가 설 수 있게."

 

"머리에 두건을 씌워주지마시오. 나는 그런거 필요 없소."

 

그렇게 그는 스스로 뚜벅뚜벅 교수대로 걸어가 목을 매었다.


당신은 아이히만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독일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악으로 분류되었을까.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은 악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당신의 고유 의지로 저지르는 것만이 순수한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규범과 본인에게 들어오는 여러가지의 압박으로 인한 선택도

 

누군가에겐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 니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경우, 니체의 자유의지가 가장 절실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순수하게 나를 돌아봐, 이런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바란다.

영화 박열(2017)

이번 포스팅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일제강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은 명백히 존재했던 사실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직접피해자와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이 점은 분명히 하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일본 가니가와 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고, 집안 사정으로 조선에서 수학했다.

 

1919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박 열

박 열.

 

조선 경상북도 문경 태생.

 

3.1운동 가담 혐의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19년 일본으로 출국했다.

 


1920년 가네코 후미코는 친구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시 한편을 발견하게 된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이 시에 매료된다.

 


<개새끼>라는 시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열은 3.1운동 이 후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 당시 더이상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고조되었고,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자)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나키즘이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운동이다.

국가나 정부 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민족독립을 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다.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개새끼라는 시는 높은 양반(일제)이 자신을 향해 오줌(탄압)을 누어도

 

굴하지 않고 맞서서 자기도 그들에게 오줌발을 갈기겠다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한 풍자시다.

 

억압 받는 나라의 국민이라도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통쾌하게 한방 먹이겠다는 박열의 당당함에

 

후미코는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일본 내에서 박열은 평범한 조선인 유학생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모임을 주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명백한 독립운동가였다.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 유학생들과 자주 교류하는 와중

 

<개새끼>의 저자인 박열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시로 어렴풋이 느꼈던 그의 사상에 더욱 공감하게 됐고,

 

다른 민족이고 심지어 본인의 조국에 칼끝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박열은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태생적으로 타고난 국적의 차이과 본인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요. 제가 함께하고 싶어요."  -후미코

조선독립운동가와 일본인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동지가 되어 함께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에 발각된다.

 

일제는 즉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체포했고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

 

박열은 본인의 단독으로 계획한 거사라고 주장하여

 

그녀에게 죄가 내려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たしも きょうはん."

 

"나는 공범이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실제 그녀가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은채로 가네코는 조선의 한복을 입은 채로 재판에 임한다.

 

그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들은 사형선고 전,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이별해야 했다.

 

복역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박열은 22년 4개월 후 광복이 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출소 후에 그는 아내의 기일에는 음식도 먹지 않으며 그녀를 기렸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은 명확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잘못은 분명 몇몇 전범들과 그 당시 일본제국에서 충성을 바쳤던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들의 정책적인 이끔으로 일본 국민들은 따랐던 것이다.

 

잘못된 건 우두머리의 선택이다.

 

위의 사례처럼,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들 조선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아닌 사례도 많았겠지만.

 

최근 한일간의 무역전쟁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불매운동도 일어나고 양국간의 경제적 보복도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조금 이슈가 잠잠해졌을뿐이지 아직도 그 기류는 흐르고 있다고 본다.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상과 일본의 정상간에 어떤 감정의 다툼이 있었고

 

또 어떤 세력은 그 갈등으로 얻는 이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한일 양국의 평범한 국민들끼리는 싸우지 않았으면 좋곘다.

 

일부 극우세력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나라도 양 극단의 사람들은 참 특이한 분들이지 않나.

 

일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참 힘든 상황에서 인접국끼리의 문화적, 경제적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분야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잘못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후미코와 박열이 국경을 초월해 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적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유벤투스 과거 로고

유벤투스(Juventus Football Club S.p.A.)

1897년 11월 1일 창단됐고, 이탈리아 토리노에 적을 둔 클럽이다.

우리나라에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소속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리에 A 우승 36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등

현재 세리에 클럽 가운데 스쿠데토(우승)을 가장 많이 차지한 구단인 유벤투스의 경력에는

세리에 B 우승(2006-07)이 어울리지 않게 박혀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칼초폴리를 들어보셨는가.

칼초폴리란 이탈리아어로 Calciopoli.

단어 자체는 90년대 이탈리아 제1공화국의 부정부패를 드러낸 '탄젠토폴리(Tangentopoli) 스캔들'에서 유래하였다.

'칼초'(calcio)는 이탈리아어로 축구를 뜻한다.

의역하자면, 축구 부정부패 쯤이 되겠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1998년 7월 AS로마의 감독 즈데넥 제만이 유벤투스의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이탈리아 검찰은 유벤투스에 대한 전반적 조사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감청을 시작했다.

그때, 루치아노 폴리(유벤투스 단장)가 이탈리아 축구협회 간부에게

유벤투스 경기에 배정된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듣게되었다.


검찰 뿐 아니라 같은 세리에A 소속 구단들 사이에서도 유벤투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2006년 당시, 인터밀란에 소속되어 있었던 루이스 피구와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가

유벤투스의 수상한 행보에 대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테르의 공론화 기사(출처: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139&amp;aid=0000002349)

텔레콤 이탈리아는 유벤투스의 단장인 모지와 UEFA 심판배정 부위원장과의 통화 등 도청 결과 다수를 검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토리노 검찰청의 수석검사, 마탈레나는 도청내용에 대해

범죄 청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고 FIGC(Federazione Italiana Giuoco Calcio, 이탈리아 축구연맹)으로

자료를 이관한다.

당시 녹취 내용을 들어보면,

"도대체 누가 그딴 심판을 보낸거야?" -모지

" 그는 최고의 심판이오 ㅋ" -베르가모

하는 등 배정에 대해 둘이 공모했다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로 수사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터졌다.

나폴리 검찰청에서 도청자료를 토대로 모지가 소유한 에이전시 회사인 GEA월드의

에이전트 계약시의 불법행위 정황을 포착한 것이였다.

사실 이 것은 유벤투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모지 개인과 그의 아들, 유벤투스의 전 감독인 리피 등 구단 관련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이후 일련의 조사과정에서

5개 구단의 6명의 인사들이 "심판배정관여 및 판정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5개 구단은 모두 (유벤투스, 레지나칼초, 라치오, 피오렌티나, AC밀란)이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협회 차원의 5개 구단의 징계가 이뤄졌는데,

1차 판정

2차 판정

최종 판정

유벤투스 FC

세리에 C 강등, 승점 -30

세리에 B 강등, 승점 -17, 2시즌 우승 박탈

세리에 B 강등, 승점 -9, 2시즌 우승 박탈

레지나 칼초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5

잔류, 승점 -11

SS 라치오

세리에 B 강등, 승점 -7

잔류, 승점 -11

잔류, 승점 -3

ACF 피오렌티나

세리에 B 강등, 승점 -12

잔류, 승점 -19

잔류, 승점 -15

AC 밀란

세리에 B 강등, 승점 -15

잔류, 승점 -8

잔류, 승점 -8


모두 다음과 같다.

최종 판정에서 유벤투스는 5개 팀 중 가장 무거운 강등과 2시즌 우승 박탈 중징계를 받았다.

2015년 9월 9일 이탈리아 대법원 최종 판결문이 공개되었는데,

판결문을 살펴보며 유벤투스의 범죄 내용을 살펴보자.

I giudici sottolineano l'"irruenta forza di penetrazione anche in ambito federale" dell'ex dirigente bianconero.
대법관들은 전 유벤투스 단장이 "축구협회 등의 공식기관들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Dell'ex dg juventino, la Suprema Corte dice che aveva una "poliedrica capacità di insinuarsi, 'sine titulo', nei gangli vitali dell'organizzazione calcistica ufficiale (Figc e organi in essa inseriti, quali l'Aia)". Senza timore di cadere in "enfatizzazioni", secondo la Cassazione, Moggi aveva una "incontroversa abilità di penetrazione e di condizionamento dei soggetti che si interfacciavano" con lui.
전 유벤투스 단장은 "다각적으로 공인 축구 기관(FIGC 및 그 산하 조직)들의 핵심을 파고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대법원은 말했다. 또한 "과장을 일절 섞지 않고서도" 모지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첨언했다.

Nelle sue "incursioni negli spogliatoi degli arbitri, al termine delle partite, non solo non lesinava giudizi aspramente negativi sull'operato dei direttori di gara, ma esercitava un potere di interlocuzione aggressiva e minacciosa, frutto soltanto di un esercizio smodato del potere - scrive la Cassazione -. Emblematici gli episodi che riguardarono l'arbitro Paparesta e il guardalinee Farneti".
"경기가 종료되면 모지는 심판들의 라커룸에 진입하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정들을 강경하게 비난함은 물론 공격적인 언어로 심판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며, 이는 과도한 권력 행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법원은 명시한다. 파파레스타 주심과 파네티 선심에 대한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L'influenza di Luciano Moggi si estendeva anche su Il processo del luned? - trasmissione condotta all'epoca da Aldo Biscardi -. Ad esempio, affinch? nel corso della trasmissione sportiva specializzata "venisse espresso un giudizio tecnico favorevole", dal commentatore ed ex arbitro Fabio Baldas, sul conto dell'arbitro Tiziano Pieri che aveva diretto Bologna-Juventus, partita contestatissima e vinta uno a zero dai bianconeri il 12 dicembre del 2004. I supremi giudici rilevano che sono emerse "conversazioni significative" tra le quali una tra Moggi e Baldas e l'altra tra Baldas e l'ex designatore Pierluigi Pairetto "in cui il primo chiarisce al secondo la tecnica di applicazione della moviola per evitare di far risaltare i gravi errori commessi dall'arbitro in quella partita, a favore della Juventus".
모지의 입김은 월요일 알도 비스카르디(유명 축구 캐스터)가 진행하는 방송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04년 12월 12일 유벤투스가 0:1로 승리한 볼로냐-유벤투스 경기에서 논란이 되는 판정을 한 심판 티지아노 피에리를 옹호하기 위해, 해설자이자 전직 심판인 파비오 발다스로부터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에서 "유리한 기술적 견해"를 얻어냈다. 대법관들은 이와 관련해 모지와 발다스 사이, 발다스와 전직 심판배정관 피에르루이지 파이레토 사이에 "유의미한 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으며, "이 통화에서 모지는 발다스에게 해당 경기에서 심판이 저지르고 유벤투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오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영상장치를 어떻게 조작할 지를 설명했다.

요약해보면 유벤투스 단장(모지)은

공인 축구 기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권력을 가진 상태였으며

이를 이용해 세리에A 심판진들에게 유벤투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도록 협박했고,

언론 프로그램까지 장악해 유벤투스에게 이로운 이야기를 하도록 요구했으며

심판배정관과 전직 심판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과 함께,

유벤투스에 유리하게 작용된 오심이 드러나지 않게 영상장치를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계가 충격에 빠졌으며

1980~1990년대 흥행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세리에A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도별 리그 UEFA 포인트(보통 이것으로 리그의 수준을 매긴다)

2006년의 그래프를 보면 줄곧 라리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던 세리에A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2위를 내주는 상황이다.

칼초폴리는 2010년대 후반까지 이탈리아 축구계를 장기 침체로 빠뜨렸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1-2012 시즌 승부조작 혐의로 50여명이 체포되면서

세리에A는 범죄리그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 델피에로.

2000년대 해외축구를 즐겨보셨던 분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델피에로는 2001년부터 안토니오 콘테의 뒤를 이은 유벤투스의 주장이었다.

2006-2007시즌 칼초폴리 사건으로 인해 유벤투스는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델피에로의 실력은 매우 출중했기에 맨유를 포함한 타팀에서 활발한 관심과 이적요청이 쇄도했다.

이때 그는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며 팀에 남는다.

덧붙이자면, 유벤투스의 팬들 별명이 '올드레이디'이다.

그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유벤투스 선수들은 팬들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델피에로 말고도 유벤투스를 위해 팀에 남은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잔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등"

그들에 대한 유벤투스 팬들의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델피에로는 강등된 바로 다음 시즌에 세리에B를 폭격하며 팀을 다시 승격시킨다.

그리곤 세리에A 복귀 시즌에 21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을 수상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노쇠화로 인해,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유벤투스에 헌신했다.

예전만큼의 환상적인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리더십과 센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2012년 5월 13일.

이미 리그 우승을 확정한 이후, 이탈란타와의 리그 최종전에 델피에로의 축구인생 마지막 경기가 펼쳐진다.

전반 28분 득점까지 성공하며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판타지스타란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후반 교체되는 순간 알리안츠아레나(유벤투스 홈구장)에 모인 모든 관중, 상대팀 선수들까지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

유벤투스를 미치도록 사랑한 판타지스타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타들어갔다.

2012-06-30
이제 끝입니다. 저와 유벤투스와의 계약은 오늘로서 막을 내립니다.
꽤 오래된 뉴스이긴 해도 공식적이란 말은 꽤 강하게 다가오는군요. 제게는 슬픈시간은 아닙니다. 전 어떤 후회도 회한도 없습니다. 요즘 전 제가 비안코네리로 지내왔던 지난 시즌들과 추억들 그리고 저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던 그 순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추억들과 기쁨과 환희,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해서 요 근래의 쓰라린 순간까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었고 토리노에서 가진 나의 마지막 경기후 나눈 포옹 속에서 어느 순간 떠올려진 순간들이 희미하고 거의 사라져가는 것 까지도 보여지더군요. 5월 13일에 찍힌 제 사진에는 제가 영원히 간직하고픈 모든 것들이 제 마음에 영원히 세겨져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말입니다.

얼마전 휴가를 떠나기 앞서 비노보에 있는 제 락커룸을 정리하고 훈련장을 떠날 때, 여러분이 저와 사진을 찍거나, 제 사인을 받기 위해, 또는 저와 악수를 하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낮이거나 절 기다리시는 걸 몇 개월 동안이나 해 오셨던 팬들 여러분이 기다리고 계시던 그 장소에 멈춰 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가 여러분에게 작별의 인사와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차례가 되었군요.

선수들은 왔다 갈 뿐이지만 유벤투스는 계속 남아있습니다. 나의 팀동료들도 거기에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전 그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전 언제나 그들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 팬들 역시 계속 남아계실 것이고 바로 여러분들이 유벤투스입니다. 여기 남겨진 제 유니폼 역시 전 계속 가감없이 사랑할 것이고 존중할 겁니다. 넘버 10이 들어간 제 이름이 세겨졌던 제 유니폼이 내 후의 어떤 이가 입을 것을 생각하니 행복감이 넘칩니다. 아울러 전 그 유니폼을 입게 될 그 누군가 —그가 이탈리아인이든 다른 해외출신이든— 에게 기쁨을 느낍니다. 그 역시 이 유니폼을 그토록 입기를 희망했었을테니까 말이죠. 아울러 그 누군가가 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제가 저 이전의 레전드들과 챔피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었던것과 같이 그러려고 한다면 제겐 더 없는 영광이 될 거구요.

내일부터 전 더 이상 유벤투스의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 언제나 여러분들 중 한명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자 이제 새로운 모험을 할 차례로군요. 19년전의 그때의 여름과 같이 전 지금 굉장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들 고맙습니다.

알레산드로

그가 유벤투스를 떠나며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유벤투스팬들은 그를 보내며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는 유벤투스를 떠나 호주리그로 이적하며 선수생활 막바지를 준비했다.

그리곤 2015년 은퇴했다.


아직까지도 델피에로는 팀의 위기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헌신한 유벤투스의 슈퍼레전드이자 판타지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칼초폴리 사건과 유벤투스 선수들은 별개로 생각해야한다.

칼초폴리는 유벤투스 단장이었던 모리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고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수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모리의 범죄로 가장 피해를 입은건 유벤투스에 헌신했던 선수들과 팬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델피에로 같은 스타는 더이상 팀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칠 때,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남은 그는

돈주고도 못 살 유벤투스 팬들의 영원한 지지를 얻었다.


우리는 종종 순간의 이익을 위해, 영원의 가치를 포기한다.

순간 닥칠 위기의 두려움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멀게 만든다.

델피에로의 로맨틱한 결정을 보며 기도하자.

" 내 고난과 역경에도, 밝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주소서." 라고

두려움은 잠시일 뿐이다.


문학을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시절, 그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누나를 보곤 사랑에 빠진다.

 

그 도서관은 할아버지와 누나, 이렇게 두명이서 운영되었는데

 

소년은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붙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매일매일 도서관을 다니며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몇 년이고 눈으로만 담던 그 여인을 뒤로한 채, 

 

야속하게도 국방부는 그를 부른다.

 

그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군대로 떠났고,

 

도서관에는 매일 오던 소년이 발길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군대에서도 그녀를 잊지 못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휴가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지독한 군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휴가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곳엔 그가 하염없이 그렸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할아버지와 그녀가 있어야 할 그곳엔, 어느 낯선 사람만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을뿐이었다.

 

다급해진 그는 낯선이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지만, 

 

어느 먼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제대한 후에도 한 순간도 그녀를 잊지 못하며 방방곳곳 찾아 헤멨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게 된 후에도 그의 마음 한켠엔 그 여인이 남아있었다.

 

그는 종이에 그녀를 생각하며 문장을 써내려갔다.

 

 

 

즐거운 편지

 

황 동 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위의 이야기는 황동규 시인의 실제 이야기다.

 

그가 결혼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이런 시를 썼다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기도 하다.

 

그가 이런 시를 쓴 배경에는, 물론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해서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기억이 그리워 썼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첫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그 때의 아련한 기억과 분위기, 또 본인의 서툴렀던 모습들이

 

첫사랑의 기억을 수식하며 미화한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난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황동규 시인이 그녀를 찾아서 다시 만난다면, 

 

매일매일 도서관을 다니던 그 소년의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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